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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홍준표 검사시절

by @#$*&! 202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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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형 비리에 대항하다가 검사 시절 내내 아웃사이더나 왕따였고, 결국 법복까지 벗고 말았다. 대부분의 검사 출신 정치인들이 권력과 유착하던 검사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 이 굵직한 업적들 때문에 홍준표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있는 법조계/민주화 운동 출신 정치인들은 홍준표를 어느 정도는 비판할지언정 마구잡이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민주화 투사 사이 인기 법조인이었던 과거가 있다. 당시에는 판사는 이회창처럼, 검사는 홍준표처럼, 변호사는 노무현처럼 하라는 말이 있었다.

1. 초임 검사 시절


1984년 홍판표 합격자는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청주지방검찰청에 초임검사로 데뷔했다. 이때 같은 청주지검에서 근무하던 황교안 총리와도 인연을 맺는다(황교안은 사법연수원 제13기 출신이다. 당시 홍판표는 제14기). 윤영오 당시 청주지방법원장이 '준표'로 바꿔줬고 이때부터 홍준표로 불리기 시작했다. 발음도 어려워 ‘판’을 좀 바꿔보라고 윤 청주지법장이 권유했다.

1987년 울산지방검찰청 검사로 전임됐다. 이때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 골재 무허가 채취와 관련된 사기 사건을 수사하자 이것이 단순 사기건이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의 누나 전명렬(1922)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임을 포착했다. 홍준표는 전명렬을 조사하기 위해 소환하려 했으나 안기부 경남 분실장이 만류한데 이어 자신의 사수마저 제지해 포기했다. 이때를 회고하는 홍준표는 부당한 간섭을 배제하는 방법을 먼저 연구하자 결심했다고 한다.

2.남부지청 특수부 시절

1988년 노태우 정권 출범 후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특수부 검사로 부임했다. 이 때 검거 실적도 꽤 높았던 것은 물론, 서슬 퍼렇던 군부 독재 시절에도 권력 비리까지 연이어 건드리는 등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당시 서정희 치안본부 정보분실장을 구속기소했던 게 눈에 띈다. 서씨는 청와대 비서실 산하 대통령 친인척관리담당관을 겸임중이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돈 회사가 부도나자 회사 부동산을 자기 지위를 이용해 비싼 값으로 대신 처분해 주면서 대금 일부를 횡령한 사실이 적발됐다. 또 전두환의 외조카인 김영도가 구속사건 무마를 청탁받고 뇌물을 수뢰한 사실을 적발해 구속 기소하기도 했다.

3. 노량진수산시장 사건 수사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 전기환이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 이학봉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통해 서울시, 치안본부, 국세청, 감사원 등을 움직여 노량진수산시장 경영권을 강탈한 사실을 적발하고 구속 기소했다.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3당 합당에 성공하고 1988 서울 올림픽 개최의 열매를 거두는 등 혜택을 봤지만, 상왕 노릇을 하려는 전 대통령의 권력형 비리를 터뜨려 그의 입지를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홍준표는 이런 시세 흐름을 타고 크게 활약했지만, 노량진 수사 건은 당시 노태우 정권의 실세와도 연루되는 등, 자칫 노 정권까지 위험하게 할 우려가 있어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는 사건을 덮으라 지시했다. 그렇지만 홍준표는 이런 권부의 요구를 무시하고 수사를 강행했다. 통제가 안되자 상부에서는 남부지청 특수부에 부임한지 4개월 만에 홍준표를 형사부로 좌천시켰다. 수사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이첩돼 이학봉 전 민정수석과 전기환이 구속기소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사실 30여년이 넘게 지난 2020년대에도 정권에 밉보이면 인사로 좌천시키곤 하는데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많이 봐준것이다. 공무원은 특별한 사유 없이 해직시킬 수 없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인사로 괴롭히는 것이다. 도저히 어떻게 할수 없이 사표를 안낼수 없도록 좌천시키는게 가장 빠르다.


홍준표는 검사 동일체 원칙을 어긴 이른바 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찍혀 출세길에서 멀어졌다. 원래 명문고 출신도, 서울 법대 출신도 아니라 특수부 발령은 무리였다지만 깨끗한 검사 이미지로 이름을 알려 엘리트 코스에의 희망이 보였던 홍준표로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허나 당시 검찰 엘리트 코스 가운데 하나였던 공안 검사를 못해본 건 나중에 정치인으로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볼 수 있겠다.

사설을 덧붙이지면 검찰 내에는 직접 수사 부서가 셋 있는데 특수부, 공안부가 검찰의 꽃이고 강력부까지 3부서가 된다. 경찰을 지휘해 수사하는 일반적인 검찰 수사와 달리 직접 수사를 맡아 하기 때문에 수사 진행도 빠르고 이름을 알리기도 좋다.

4. 광주지검 강력부 시절

남부지청 특수부에서 형사부로 좌천된데 이어 1991년에는 아예 광주지검 강력부로 좌천됐다. 홍준표는 낙담하지 않고 곧바로 광주 조폭 국제 PJ파 수사에 착수한다. 전년도 1990년 10월 13일 부로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즈음이었다. 5월엔 광주 경찰이 시민을 구타한 사건을 강력 처리했고, 7월에는 건설 입찰 대가로 뇌물을 준 건설업체와 연고지역 업체끼리의 담합을 적발했다. 1991년 12월에는 국제 PJ파와 일본 야쿠자의 연대를 포착, 12월 4일 현장을 덮쳐 일망타진하고 32명을 구속시켰다.

5. 서울지검 강력부 시절

광주지검 강력부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2년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검사로 발령됐다. 그는 파키스탄인 폭력조직 주비파 두목 임란 사자드 외 13명을 적발, 체포해 그해 9월 22일 임란 사자드 외 3명에게 사형, 나머지 10명에게는 징역 15년형을 구형했다. 이 사건은 '최초의 외국인 사형구형 사례'로서 각 일간지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이태원을 중심으로 '비키파'와 '주비파'라는 파키스탄 폭력조직이 활동했는데 비키파 조직원이 위조지폐로 귀금속을 사려다 적발되자 주비파 이름을 팔았다. 일명 '주비' 임란은 문제가 커질까봐 귀금속 값을 대신 치루고 비키파를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비파 조직원 일명 고고가 린치를 당해 살해되자 이를 빌미로 비키파 두목 비키(모크테르 아흐메드)와 나나(아흐산 주베르)를 납치해 성남 야산에서 살해한 사건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주비파 조직원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 형을 최종 선고받고 각각 광주 교도소와 안동 교도소에 수감됐다. 조직원 중 셋은 5년형, 나머지 일곱 명은 방면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1996년 가을 문제가 된다. 사형수로 5년 째 복역중이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탄원서를 썼다. 실은 자기들이 한국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됐고 조직원도 아니며, 범행 날짜로 알려진 날은 파키스탄 명절로 취업 브로커도 겸하던 임란을 찾아갔다가 얼떨결에 성남 야산에 같이 있었을 뿐인데 임란이 자기들에게 누명을 씌웠다라는 거였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수사팀이 그나마 한국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임란의 진술에만 의존해 수사했고, 통역은 엉터리였으며, 심지어 심문 과정에서 경찰이 각목에 젖은 천을 감아 구타하고, 성기에 전기 고문을 가하는 등 13일 간 모진 고문을 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은 고통에 못이겨 자백을 강요당했고, 자신과 조직원을 보호하려는 임란의 거짓 진술에 의해 졸지에 사형수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97년 3월 유엔 인권위원회는 한국 검찰 수사에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 정부 측에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한국 당국은 위원회의 자료 요청에 대해 즉각 응하는 대신, 희생자 및 증인 보호 등을 위해 해당 종결 사건의 기록에 대한 숙독, 촬영, 무단 전제는 제한했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0.5항).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비록 공판 당시 속기록이 제공되지 않아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검토할 수 없었다는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한국 사법당국에서 보내온 구속기간 중 신체검사내역서 및 통역인들의 증언을 비롯한 각종 자료, 또한 1심과 2심의 판결 모두 고려한 결과, 위원회는 한국의 법체계(jurisprudence)에 따른 1심과 2심의 판결을 받아들이며, 두 사람에 대한 처우 및 판결에 대해 임의적이거나 사법정의가 부정됐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4.2항). 동년 5월, 5년 형을 마친 나머지 세 조직원은 강제 출국됐고 사형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98년 2월 자로 종신형으로 감형됐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99년 2월 '주비' 임란 사자드와 삼일절 특사로 사면을 받아 강제추방됐다.

홍준표는 훗날 2017년 4월 27일 서산 유세 때 유력 대선 주자로서 사형제 부활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흉악범은 반드시 사형시켜야 하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도 중요하다가 주요 논지인데, 폭력집단과 지속적으로 씨름해온 그의 법조계 이력이 사형제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불러온 것으로 여겨진다. 사형제는 세계적으로도 뜨거운 논란거리이므로 홍준표가 사형제 부활의 당위를 어떻게 주장해 나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 할 듯.

한편 1992년 사건 당시 사형수 두 사람이 소명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나 하는 2017년 미디어투데이의 문제제기도 있는 상태다. 김영삼 정부 마지막 3개월만을 남긴 97년 12월 30일 한꺼번에 사형수 23명이 형집행됐을 당시 두 사람은 죽을 수도 있었다. 다만 링크된 기사는 변호사 측 의견만을 기반으로 작성돼 가해자들이 '진범이 아니다'라거나, 유엔 인권위원회의 조사결과와 모순된 그들의 진술을 진실처럼 소개하는 등, 단정적인 태도로 접근한다는 점은 감안하고 판단하길 권한다. 인권위원회의 보고서에는 그들이 주장한 엉터리 통역 가능성에 대해 한국 사법당국이 통역 뿐 아니라 파키스탄 인을 따로 참고인으로 불러 진술 내용을 확인하는 등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고, 고문 주장에 대해서도 사건 종결 전 법정에서 피고와 그 변호인은 고문 등을 입증하지 못했으며 고문 때문에 다쳤다는 귀도 원래 중이염을 앓고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한국 사법체계는 고문자를 엄벌함은 물론 고문으로 인한 자백에 대해 증거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도 보고서에서 다루고 있다(인권위원회 보고서 10.3).

1992년 10월 21일에는 보험금 7억 원을 노리고 자기 지하 나이트클럽에 방화한 목포파 부두목 유희호와 행동대장 홍동표 외 6명을 체포, 구속했다.

대검찰청으로 파견된 중, 1993년 4월에는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조사했다. 이때 김종인으로부터 20분만에 뇌물 수수 자백을 받아낸 적 있다.

6. 슬롯머신 사건 수사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당시는 사정 한파라 해서 공직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아래 군부 독재 시절의 거악들을 발본색원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홍준표는 슬롯머신 사건을 맡았다. 빠찡코로 더 잘 알려진 슬롯머신의 업계매출은 당시 연 1조 2천억으로서 1조원 수준의 호텔 카지노는 물론 경마마저 능가하는 규모였다. 슬롯머신 업소 대부분은 정덕진 일파에게 장악돼 있었고, 이들은 김태촌의 서방파와 손잡은 정황 및 정관계 유력 인사들마다 로비를 하는 등 거대한 사회악으로 자라있었다.

이들은 코인 한 개에 10만 원을 넘기지 않도록 되어있는 당첨금을 600만 원까지 시상하게 하는가 하면 87%로 규정돼 있던 당첨률도 18% 이하로 조작하는 등 온갖 불법의 온상이었다. 게다가 정치와 유착해 전현직 고위 관료 출신을 주주로 앉혀 검찰의 내사를 중지시키는가 하면, 노태우 정권의 실세에게 접근해 정덕진의 친형을 구속한 검사를 좌천시키고 혐의자를 빼내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홍준표는 탈세 혐의를 씌워 일단 정덕진을 구속시키고 이후 정관계 관계자들을 내사하는 쪽으로 수사 방향을 틀었다. 이 과정에서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냈던 엄삼탁, 천기호 경찰청 치안감, 그리고 대전고등검찰청 모 검사장 등의 비리, 뇌물수수혐의 등을 입증하고 모두 구속 기소했다. 당시에도 협박과 압력을 많이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처리하였다.

슬롯머신 수사의 절정은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을 구속 기소한 것이었다. 슬롯머신 업자에게서 5억 원의 돈을 받은 혐의를 포착한 것이다. 박철언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원은 박철언의 결백하다는 주장을 외면했다. 결국 박철언은 국회의원 뱃지를 반납하고 1년 4개월 동안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이러한 일화가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알려져 홍준표는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2017년 5월 2일, 모래시계 작가 송지나는 모래시계 검사는 여러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와 여러명의 캐릭터를 조합해서 만든 가공의 인물일 뿐 모래시계 검사가 홍준표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홍준표 측에서도 곧바로 모래시계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히면서 송지나 작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후 홍준표는 1995년 대한민국 법무부 특수법령과[10]로 좌천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국가안전기획부에 파견되면서 국제범죄수사지도관이 되었다. 이 시기 안기부 러시아 지부에 주재하면서 러시아 마피아에 대한 대책을 세웠고 지금도 그 프로그램 그대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이후 파견근무를 끝내고 법무부 특수법령과로 복귀한 뒤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검찰을 나온 뒤 변호사를 개업하고 방송 출연 등에 섭외되었다.

- 권력에 유착하려는 기회주의자들에게 왕따 당하는 홍준표

홍준표 검사는 매우 올곧고 맡은 바에 충실하고 시대정신이 투철한 검사였는데, 권력에 유착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이 그를 왕따시킨 것이다. 홍준표가 자신의 검사 시절을 회고한 저서(홍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거요)와 수기 등을 보면,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협박에 시달렸다. 권력형 비리 범죄를 파고들다가 사건에 연루된 정부 고위 관료, 선배 법조인들, 안기부(현 국정원)를 비롯한 고위 인사에게 압력을 받았으며, 지역 토착 조폭집단을 소탕하다가 조폭들, 유지들, 또 그들이 로비한 정치인까지 홍준표를 협박했다. '당신과 당신 가족들을 모두 죽이겠다', '석궁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내버릴 수도 있다' 등. 이 때문에 본인과 가족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정계에 입문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준표는 강압에 굴하지 않고 권력형 비리와 조폭들의 범죄를 성역없이 수사했다. 자신의 상관이라 할지라도 혐의점이 발견되면 어김없이 구속수사를 해서 죄를 물었고 이런 검사로서의 소명을 끝내 버리지 않았기에 미움을 샀다. 전두환의 친인척들을 수사하여 진작부터 밉보였던 홍준표는 서울지검 남부지청 특수부 발령 4개월만에 전보되어 이후 강력부와 형사부를 전전했다. 결국 슬롯머신 비리사건 수사로 노태우 정권의 실세 박철언을 구속하며 그 화룡점정을 찍고 법복을 벗었다.

검사 홍준표는 비리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정의와 법치를 지키려고 들었기 때문에 후배 법조인에게 귀감으로 남았으며 이 부분은 높게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권력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검사라는 커리어야말로 정치인 홍준표에게 상당한 재산이 되었다. 전직 고위 검사였던 홍만표가 연루된 정운호 게이트, 현직 검사장이었던 진경준이 연루된 넥슨 게이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돈봉투 만찬 사건같은 법조계 인사들과 고위 정치인들의 비리가 하나하나 발각되고, 이것들을 청산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시점이기 때문에, '검사 홍준표'로서 보여준 업적은 더욱 대단하다.

이 당시 검찰에 쫓겨나다시피 했던지라 훗날 19대 대선 당시 강력한 검찰 조직 개혁 공약을 내걸었었다. 검찰 조직의 썩어빠진 면모를 지긋지긋하게 겪으며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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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초년시절

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정치인. 現 제21대 국회의원(대구 수성구 을). 1982년 사법시험(24회)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14기)을 수료하고 1984년 청주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데뷔했다. 전두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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