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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1990년대 후반, 탈옥으로 대한민국을 뒤흔든 범죄자- 신창원

by @#$*&! 2020.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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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

출생 : 1967년 5월 28일

출생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학력 :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신체 : 172cm, 67kg, O형

가족 : 5남매중 넷째 (3남)

1990년대 후반, 탈옥으로 대한민국을 뒤흔든 범죄자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신창원에게는 지독한가난도 고통이었지만,어머니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만약아버지가 그를 사랑해주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엇나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을 속였다는 이유로 신창원을 때렸고, 나중에는 계모까지 들어왔다. 계모는 신창원의 동생이 아픈데도 아무 관심도 없었다.학교생활에도 별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신창원은초등학교시절부터가출을 시작했고, 결국중학교에 진학한 지 3달 만에퇴학당했다.

초등학생 시절의 신창원

그가 범죄자가 된 계기는 그의 저서에 남양국민학교 5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라는 막말을 듣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악마가 태어났음을 느끼고 어둠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21세기에 인권존중을 그나마 어느 정도는 받으며 초중등 교육을 마친 세대들이 보기에는 "세상에 그딴 막돼먹은 몹쓸 쓰레기 같은교사들이 어딨냐?"라며 믿지 못하고 그냥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거짓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만 해도 만화검정 고무신이나 소설흰종이 수염에 나오는 것처럼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도 없는 이러한 잡다한 납입금을 안 냈다는 이유로 교장이나 교감 같은 높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엄하게 가르쳐야 강하게 자란다는 핑계나 다름없는 명분을 내세워 담임들에게 돈을 안 가지고 온 아이들을 때리라고 지시하거나 담임들이 교실 앞에 불러세워 놓고,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안 내면졸업못한다' 식으로 으름장을 놓은 온건한 타입부터 두들겨 패고 모욕감을 주거나 심지어 수업받을 자격이 없다며 교실에서 내쫓는 썩어빠진 부패한 교사들이분명히 있었고 심지어 많았다.인권의식 및 시민의식이 낮았던 당시 시대 분위기도 한몫했다.

범죄자의 길

이런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신창원이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만들었으며,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남의 밭과 가게에서 먹을 것을 훔쳐 먹고 동네에서,수박서리를 하기 시작한 게 도둑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는 달리기가 빨라 도망치면 아무도 못 잡았다고 동네 사람들이 전한다. 또한 무작정 멀리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서 추적자의 동향을 살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것이 14살 때였다. 어느 날 좀도둑질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이때까지는 신창원을 범죄자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창원의 아버지는아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답시고, 경찰관들도훈방조치한 신창원을 굳이 다시 끌고 와서소년원에 넣어달라고 사정을 하여 잡아넣었다.아버지의 의도는 정말 좋은 뜻이었는지 어떤지 몰라도, 이 때문에 신창원의 인생은 망가졌다. 소년원을 다녀온 일을 계기로 감옥에 한 번씩 갔다 올 때마다 그의 범죄는 나날이 대담해졌으며, 결국에는 강력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신창원은 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 했다.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했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권투를 배워 걸핏하면 남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합의금으로 줄 돈이 없어 후배들과 함께 돈 좀 있어 보이는 행인을 협박해 돈을 털기도 했다.

이후 서울에서 고향 선후배 4명과 모의해슈퍼마켓과 금은방 등에서강도 행각을 벌이다 1989년 3월 28일에 주범인 김양훈이문구점을 운영하는 피해자를 살해하게 된다.다른 일당 4명은 4월 1일에 체포됐지만, 신창원은 총상을 입고 도주에 성공했고 반 년 뒤에 체포되었다.

이후강도살인치사죄무기징역을 받고,경북북부제2교도소에서 복역한다.

 

탈옥

 

이후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다 1997년 1월탈옥을 저질렀다. 노역 작업 도중 손에 넣은 작은 실톱날 조각으로 하루 20분씩 무려 4개월간[10]들키지 않도록 화장실 쇠창살을 몰래 조금씩 그어 마침내 지름 1.5cm의 쇠창살 2개를 끊었고, 감방을 빠져나와서 외벽 환기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끊은 쇠창살로 20m 가량 떨어진 교도소 내 교회 신축공사장 철담장 밑의 언 땅을 폭 53cm 깊이 20cm 가량 파내어 공사장으로 들어간 후, 공사장에서 주운 밧줄을 타고 외부로 통하는 공사장 펜스를 넘어 교도소를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는 데에는 1시간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사전에 동료 죄수들을 포섭했다거나 심지어 교도소의 묵인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설이 제기될 정도로 신출귀몰한 탈출이었다. 이 탈옥을 위해 좁은 곳을 지나가기 쉽도록 15kg을 감량하였고, 신뢰를 쌓아 감시를 줄이기 위해 오랜기간 모범수로 지냈다고 한다. 교도소를 빠져 나간 신창원은 500m 떨어진 화훼 농가로 침입하여 옷을 훔쳐 입고 자전거를 훔쳐 4km를 달려 구포사거리까지 간 뒤, 택시를 타고서울로 잠입했다.

그 뒤 2년 6개월간 4만여km 의 거리의 도주를 계속하였으며, 도주를 다니는 동안 빈집들을 털며 훔친 현금으로 생활하였고 이동 수단도 훔친 차를 이용하였다. 그렇게 도망 다니는 동안 잡힐 듯 하면서도 체포 직전에경찰의 추격을 따돌린 것만 무려 6번이었다. 연 인원 97만 여명이 동원되었고, 전국 6개 지역 지방 경찰청에 수사 본부가 설치되는 등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주 행각을 벌였다. 그 중 유독천안시근처에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천안 시내 이곳저곳 마다 경찰 병력이 배치되고 차량 검문이 실시되었으며 천안 시민들이 공포에 떨어야 했다. 천안 이외에도 지나간 곳이 많아 곳곳마다 해당 지역 경찰서높으신 분들목이 날아갔다.당시 신창원 검거 실패로 징계 받은 경찰은 29명, 총경 이상만 10명이었다고 한다.심지어 당시 복무하던전의경과 경교대원들에게도 악몽으로 기억되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진급 정체를 해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또한 이 때 진급한김석기등이 나중에 서울지방경찰청장까지 승진하게 된다.

이리하여 신창원은 방송을 타며전국구급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현상금이 1,000만원에서 5,000만원이 넘어갔다. 이는 당시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사상 최고액현상금으로, 2011년까지 매 년마다산불을 일으킨방화범일명 '봉대산 불다람쥐'에 현상금 3억원이 걸릴 때까지 경신 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유병언이 현상금5억원으로 기록을 다시 깬다.

1999년 당시 5,000만원은 단순 소비자물가지수가치환산으로도 2018년 기준 약 8,000만원이며, 최저임금으로 산정해보면1999년 최저임금은 시급 1,600원이므로 시급 7,530원인 2018년에는 약 2억 3,500만원이고, 당시대치동 은마아파트35평이 1억 5천만원에 매매되던 시절이니 엄청나게 큰 현상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별의 별 천태만상들이 나왔는데, 신창원이 나타난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도 저 혼자 공 세우려고 단독으로 검거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징계를 받은 형사가 있는가 하면,잠복근무를 하던 형사가 신창원 동거녀를 성폭행하여 결국 파면되고 구속되지 않나, 신창원 관련한 신고를 받고 천신만고 끝에 검거했는데 알고 보니 신창원을 사칭한 강도범인 경우도 있었다. 가장 압권은 시민의 신고로 검거된 상태에서 경찰의 부주의로 놓친 일이 있었는데, 이걸 가지고 현상금 못 주겠다고 경찰 측에서 땡깡을 부려, 신고자가 소송을 내고 대법원까지 끌고 가면서 5,000만원을 다 받아냈다. 이리하여 신창원 현상금은 2번 지급되었다.

거기에 신창원은 경찰의발터 PP에 맞았는데도 기어코 도망을 가고, 격투 중 부러진 뼈를 혼자 맞추기도 했다. 추격이 심할 땐 쥐를 잡아먹으면서 박스 안에서 일주일 넘게 은신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그는 문신이 있다. 아무리 별의 별 변장을 해도 문신을 지울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문신을 가리기 위해 한여름에도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자주 활보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는데 쓰인다.

신창원 곁에는 늘 여자가 있었다. 검거당시 신창원은전북익산시은하수카페 종업원 김모 양과동거하며 결혼을 약속했다. 6월 29일 김 양은전남순천시에 내려가 대주파크빌을 계약하고 다음날부터 곧장 살림을 시작했다. 신창원은 이 때 김 양에게 돈다발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나를 배신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등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7월 16일 신창원이 검거되자, 김 양은 이러한 사정을 털어놓으며 "아파트는 내 이름으로 계약했으니 빼앗지 말아달라."라고 경찰에 사정했다. 김 양에게 중요한 것은 신창원과의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던 것이다. 결국, 신창원은 자신을 숨겨줄 여자가 필요했고 여자는 돈이 필요해서 이해관계가 떨어진 것이 '신창원의 여복'이었던 셈이다. 물론 신창원도 여자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도피처로 이용했던 것이기에 서로 각자의 이익을 위한 필요관계에 불과했던 것.

검거

1999년 7월 16일전라남도순천시금당 대주아파트 104동 205호에서 가스레인지 수리공[13]은 당시 우연히 의뢰 받은 집을 수리하다가 신창원을 보았는데, 신창원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으며, 경찰에 신고 후 심지어 부동산에 들어가서 그 집이 여자의 명의로 된 건지 확인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집을 계약한 다음날 바로 입주했다는 것을 알고 신창원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대개 이사하려면 계약하고 며칠 뒤 돈을 주고 들어오는 게 보통이기 때문.

 

그가 검거될 당시 입었던 미쏘니 니트 셔츠가화제가 되어한때 저 딱 달라붙는 티셔츠가 '신창원 티셔츠'라며 유행하기도 했다. 검거된 뒤 징역 22년 6개월이 추가되었고 그는 흉악범을 가둬두는청송교도소의 2.6m2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재수감 이후

청송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신창원은 공부를 시작해 2004년 고입, 대입검정고시에 연이어 합격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탈옥 사건 이후로는 모범수로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한때개신교에 귀의했으나개신교 측의 문제로 배교한 듯 하다.

2010년 6월에 강력범을 수감하는 청송 2교도소에서 일반 교도소인 제1교도소로 이감되었다고 하며, 상담사 자격증을 목표로 감옥 내에서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고 한다. 2011년 시점으로검정고시에 합격하고, 학사학위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그가 감옥에서 주고 받은 편지들을 보면 매우 논리적이고 지적인 문장과 내용이 인상적이다. 법을 공부해서 국가와 교도소장을 상대로 4건의 소송을 제기했는데승소했다.

2011년 8월 18일 감방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했다. 시도 이유는 1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영향을 받은 듯 하다고 한다. 신창원은 복역 초기엔 자신에게 신경쓰지 않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으나 다시 감옥에 들어간 뒤로그를 찾아온 건 아버지 뿐이었다고 한다. 신창원은 극심한저산소증으로 상당히 위중했으나 얼마 후 의식을 회복했고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보도가 이어졌지만, 늦게 발견된 탓에 뇌손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 8월 22일, 그가 지난 1월에 한국의 교도소 행정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낸 편지를 문성호 자치경찰연구소장에게 보냈다는 기사가 실렸다.참고문 소장은 이 때문인지, 아버지의 죽음보다 장기수에 대한 절망적인 수용 실태 때문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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