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

홍정욱은 누구인가?

by @#$*&! 2020. 4. 25.
728x90

유명 영화배우 남궁원의 아들

홍정욱은 1970 4 19일 서울에서, 미남배우로 유명한 영화배우 남궁원과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의 미국 노스웨스트항공 스튜어디스 출신인 모친 사이에서 1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낸 그는 1985년 압구정중학교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89년에는 초트 로즈메리 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하버드대학교 동북아시아지역학과 전공으로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인 1991년에는 교환학생으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1년간 수학하기도 했다.

1993년 당시 그가 하버드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고, 졸업식이 우리나라 공중파 TV에서 생중계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유명세를 얻은 그는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생활을 소재로 한 ‘7 7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으며, 이게 국내에서 1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졸업 이듬해 북경대학교 대학원에서 장학생으로 잠시 정치학 석사과정을 지낸 그는 곧 중퇴한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스탠퍼드 로스쿨에 입학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얻은 것은 1998년이었다.

최연소 언론사 CEO로 성공을 거두다

1999 1 5,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이자 현대중공업회장의 손아래 동서의 둘째 딸인 손정희 씨와 홍정욱의 이른 결혼은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됐다. 손정희 씨의 증조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장이었으며 조부는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홍정욱 그 자신의 유명세는 물론 배우자의 후광은 이후 그가 정치계로 입문하고 또 인맥을 쌓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결혼 이후 투자금융가로 뉴욕 리먼브라더스 그룹에서, 그리고 이어서 벤처기업 스트럭시콘의 창업자로 일하던 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2001년이었다. 병역 이행을 위해 가족과 함께 귀국한 그는 2002년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헤럴드미디어를 인수해 최연소 언론사 CEO이자 헤럴드경제와 코리아헤럴드의 발행인이 됐다. 그는 인수 2년 반 만인 2005년 헤럴드미디어의 흑자 전환을 달성했으며, 기존의 매체들 외에도 캠퍼스헤럴드, 주니어헤럴드 등 다양한 매체를 창간해 성공을 거두게 된다.

돌연 출마한 총선, 그리고 당선

헤럴드미디어의 사업 확장은 계속됐다. 서울영어마을, 부산영어마을 등의 운영권을 획득해 교육사업을 확장해 나갔으며, 2007 10월에는 여성을 메인 타깃으로 삼은 패션 및 라이프 스타일 전문 케이블 채널 동아TV’ 인수했다. 하지만 그의 헤럴드 경영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2008, 사업으로 승승장구하던 홍정욱이 돌연 헤럴드 및 동아TV 회장직을 사임한 것이다.

그가 헤럴드에서 손을 놓은 이유는 정계 진출 때문이었다. 2008 4 9일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고 서울 노원구 병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 홍정욱의 카운터파트너는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였던 고 노회찬 의원이었다. 총선에서 둘은 접전을 벌인 끝에 43.1%를 득표한 홍정욱이 40.05%를 득표한 노회찬 의원을 간발의 차로 이기게 된다.

무난하게, 열심히 보낸 국회의원 시절

젊은 나이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홍정욱은 제18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 독도영토수호대책특별위원회 위원,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정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당내에서는 2009 9월 한나라당 국제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8월에는 한나라당 2030 본부장으로도 임명되었다. 이 외에도 그는 한나라당 천안함대책위, 북핵도발대책특위, 서울시당공천심사위, 지방선거기획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갔다.

3년 연속으로 NGO 국감모니터단이 평가하는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2011 6월에는 법률소비자연맹에서 주최하는 국회 의정활동 종합평가회에서 헌정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그는 때로는 여권에 쓴소리를 내기도 하고 예산안이 통과된 직후 눈물을 흘리는 민주노동당 소속 이정희 전 의원에게 손수건을 건네기도 하는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호감을 살만한 행보를 보였다. 당에서 추진하던 한미 FTA에는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투표에서 기권표를 던져 소신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도 쌓을 수 있었다.

떠날 때도 돌연, 총선 불출마 선언

하지만 그의 국회의원 생활이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선거 홍보물에 더한 수상 경력이 문제가 돼, 홍정욱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79,000부가 배포된 국회의원 선거 홍보물에 게재된 그의 이력에는 하버드대학교 졸업 논문이 토머스훕스상 수상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는데, 실제로는 본상을 수상하지 못하고 장려상에 가까운 토머스훕스 어너러블 멘션상 받았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의 재판 결과는 30만 원의 벌금형 선고였고, 간신히 국회의원직 상실을 면할 수 있었다.

수상 경력 위조를 제외하면 큰 논란이 없던 홍정욱의 국회의원 생활은 제18대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좋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2011 12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불출마 선언 당시 그는 정당과 국회를 바로 세우기에는 역량과 지혜가 턱없이 모자랐다”라, 지난 4년은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고 총선 불출마의 이유를 밝혔다. 국회의원 생활을 끝낸 후 그는 다시금 헤럴드 및 계열사로 돌아가 기업가로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순식간에 대선의 잠룡으로 부상

총선 불출마 선언 후 헤럴드 회장으로 북귀한 그는 기업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유기농 기업 올가니카라는 기업을 설립해 운영하며 헤럴드 못지않은 성공을 거뒀다. 국회의원 시절에 설립한 사단법인 올재의 이사장으로서 활동하며 지식 나눔에도 힘썼다. 정계를 떠난 이후로도 끊임없이 그의 복귀에 대한 논의와 러브콜이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거부했다. 지난 지방선거 때는 자유한국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이는 정계 복귀 의사가 없는 게 아니라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읽혔다. 서울시장이 아니라 대권을 노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었다. 실제로 그가 보수진영의 대권후보로 나서게 될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지난 5, 그는 보유하고 있던 헤럴드미디어그룹의 지분 47.8%를 중흥건설에 매각하고 회사를 떠났다. 기업가로서의 생활을 마치는 대신, 이제 홍정욱은 정계로의 복귀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순식간에 다음 대선의 잠룡으로까지 급부상하고 있는 그의 다음 행보는 자유한국당을 넘어 정치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