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정치인. 現 제21대 국회의원(대구 수성구 을).
1982년 사법시험(24회)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14기)을 수료하고 1984년 청주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데뷔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권력형 비리와 조직폭력배의 범죄를 성역 없이 수사한 정의로운 검사였고, 이러한 활약상이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소개되면서 일명 모래시계 검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 인지도를 바탕으로 YS에게 발탁되어 신한국당에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4선 국회의원과 이명박 정부 시절 한나라당 원내대표 및 당대표를 거쳐 박근혜 정부 시절 제35·36대 경상남도지사를 지냈다. 2017년 도지사직을 중도 사퇴하고 19대 대선에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2위로 낙선했다. 헌정 사상 최다 표차로 문재인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탄핵 정국임에도 안철수를 누르는 등 기대 이상으로 선방했고, 이로 인해 당내 입지가 더욱 커져 당대표를 역임하기도 했으나 2018년 7회 지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변호사 개업을 신청하고 유튜브 활동을 하며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2020년 21대 총선 때 미래통합당의 컷오프에 반발하여 탈당 후 대구 수성구 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 , 논란이 많지만 대권 잠룡으로서 현존 보수정당 정치인 중 가장 경력이 좋은 인물이다. 서울 4선 국회의원, 재선 도지사, 원내대표 1회, 당대표 2회를 거쳐 보수정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 바 있고, 21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재입성하는 것도 성공했다. 2020년 현재에도 차기 대선의 주요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출신에 경상남도지사까지 역임했지만 정치적으로 PK보다는 TK계열로 분류되는데 중·고등학교를 당시 경상북도였던 대구시에서 다니며 성향과 인맥이 형성된 케이스로 볼 수 있다. 본인도 스스로 TK의 성골은 아니라도 진골은 된다고 주장했다.
1. 초년 시절
1953년 11월 20일, 호적상 1954년 12월 5일[27]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 남지리 서동마을에서 2남 3녀 중 넷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때 이름은 홍판표. 그의 아버지는 무학에다 소작농으로 경제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어머니가 고리 사채꾼에게 머리채를 잡혀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창녕군과 합천군, 대구시 등지를 전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6군데나 전학을 다닐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귈 수 없어 공부에만 전념했다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했고 초등학교에서도 1등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영양 부실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몸이 야위었고, 초등학교 졸업 당시 키가 124cm에 불과할 정도로 왜소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합천군을 벗어나 대구시 영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숙식은 대구 직물 공장에 취직한 누나 방에 얹혀 살며 해결하기로 했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부친과 8km를 걸어 대구행 버스를 탔는데, 무거운 지게를 진 부친 뒤에서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대구 대명동 사글세방에서 누나들이 싸주는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공부했다. 그나마 도시락도 없이 혼자 운동장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다.
홍준표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대구광역시로 이사왔다.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셋방 단칸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사과 행상을,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하루 4~5시간만 자고 공부해 영남중학교에서도 1등은 그의 차지였지만 명문 경북고등학교가 아닌 영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경북고는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경북의 일류 명문이고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본인에게 컴플렉스였고, 출세에도 핸디캡이 됐다. 심지어는 대학 첫 소개팅 자리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이 나왔는데 그녀가 "집이 어디냐?", "대구다", "그럼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냐?" 하기에 , "영남고다" 그랬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이때 상처를 받은 이후로 미팅 종류의 활동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밑에 첨부된 그의 대학 시절 사진만 보더라도, 그의 지인들은 당시 홍준표 하면 그가 늘 신던 검정 고무신을 떠올리곤 한다. 소개팅녀의 행동이 혹시 영남고 때문이 아니라 그의 패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출신고를 묻는 그녀에게 순간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의 출신 고교에 대한 컴플렉스는 검찰 생활에까지 이어졌는데,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등학교 출신들이 즐비한 검찰 조직 내에서도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고등학교 동문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문화가 만연하여 비주류의 설움을 느껴야만 했고, 법학과 졸업생도 아니었으며 가난한 흙수저 출신인 것까지 더해서 검찰 내에서도 그야말로 개무시당했다고 한다.
그는 커리어에서 평생 아웃사이더 또는 비주류를 자처했는데, 그 원인으로 출신고등학교에 대한 열등감, 자신의 가난했던 집안 배경 등으로 인한 콤플렉스를 꼽는 사람도 있었다.
원래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원래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었다고 한다. 경북대가 국립대라서 학비가 저렴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어, 아버지가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가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라고 해서 육사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자 했다. 육군사관학교는 국가에서 모든 부담을 했기 때문에 사관학교 특성상 학비가 안 든다는 점도 주요한 고려 요소였다. 그런데 어느 날 대구광역시 토박이가 아닌 아버지가 시장통에서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힘없는 이들을 돕는 검사(법조인)가되기로 결심했다. 이에 1972년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때는 공부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5층 여관집에 출퇴근 가정교사를 하면서 1살 많은 제자의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대학생활 4년 중 축제 조차 딱 한 번 참여했을 정도로 바빴다. 그 와중에도 2학년 때인 1973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 선후배들과 중지를 모아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처음 낼 만큼 정의감이 강했었다. 때문에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고. 대학은 어떻게든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이상 시국 행동은 못했다. 강희락 경찰청장, 주상용 서울경찰청장, 이승재 해양경찰청장, 김성곤(1952) 의원,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송하진 전북도지사 등이 고려대학교 동기다.
그의 진학 후 더 이상 대구광역시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데다, 뒷집에 불이 났는데 가족들 집까지 다 타서 가족들은 때마침 부친이 현대조선소의 경비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울산으로 옮겨갔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어느 겨울 밤,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가 목욕탕에나 봄직한 플라스틱 샤워의자에 앉아 칼바람 부는 바닷가 모래밭에 불을 쬐고 있던 모습을 봤는데, 그때 "불공평한 세상 한 번 바꿔보자"고 다시금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당시 부친이 추운 모래밭에서 근무하니 회사에서 술이라도 먹고 버티라고 막소주를 줬다고 한다. 고된 노동과 무리한 음주로 몸이 상해서인지 부친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역시도 "세상이 디비졌으면.." 하는 생각을 지닌 운동권이었고 박정희 유신반대 학생운동을 하며 총학생회 지하유인물을 작성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엄청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문제적 인간, 홍준표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남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마지막 유언을 따라 더 이상 강성으로 나가지는 않았고 성북경찰서에서 풀려나면서 고시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간다.
사법시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72학번인 그가 6년이나 병역도 미루고 졸업도 미뤄가면서 고시 생활을 이어가던 중(1차는 붙은 상태였다), 고려대학교 부근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에서 일하던 당시 20세 여자 은행원 이순삼에게 반했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숫기는 물론 땡전 한푼 역시 없었지만, 같은 은행에 다니는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데이트를 하고선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나와 앞으로 같은 집에서 살 생각이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그 여인은 정말로 도서관으로 찾아왔고 홍준표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전북 군산시에 살고 있는 장인, 장모될 분들을 만나러 둘이 내려가서는 인사를 드렸는데, 홍준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장인은 뒤에서 딸에게 "그거 구름잡는 놈이다. 택도 아닌 놈이다. 그런 놈이 고시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했다고. 장모는 "사람 착해 보이니 잘 해봐라" 그랬다며, "어떠셨대??" 하고 묻는 그에게 이순삼이 솔직히 털어놨단다. 그 덕에 "장모는 혹 용돈을 드려도, 장인어른은 용돈은커녕 26년간 내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고 훗날 2017년 자유한국당 후보 군산 유세에서 말한 바 있다. 그렇지만 정작 마지막에는 홍준표가 장인 모시고 와서 병수발하고, 임종도 지켰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장인이 "옛날에 잘못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사과하자, 이에 홍준표는 "잘못한 줄 이제 알았습니까. 편하게 가시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가 홍준표는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신접 살림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 7동 지하 단칸 셋방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결국 군복무를 시작했다. 당시 몸무게가 48kg으로 워낙 말랐기 때문에 방위로 근무하게 됐는데, 사법시험에 붙지 못해 고향에 가기 창피했던 그는 처가가 있던 전라북도 부안군의 해안초소에서 복무하였다.
그렇게 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그리고 아내의 5년에 걸친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30살, 호적상 29살인 1982년, 드디어 제24회 사법고시 시험에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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