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10년 만에 3억 5천만 원에 달하는 빚을 갚은 인물로 방송에 나오고 책도 내면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1997년에 IMF 외환위기로 사업이 휘청거렸고 1억 원의 대출로 시작한 사업 빚이 천정부지로 늘어났다. 시계방은 문을 닫게 되었다. 빌려준 돈도 많았는데 상당수 떼이고 말았다.
그는 한 방에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곳 저 곳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지만, 큰 돈을 노리고 투자했던 돈들은 도리어 빚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이 씨는 2000년 초에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처갓집 땅도 다 팔아야 했고 형제들 돈도 가져다 써야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남은 빚이 3억 5천만 원이었다.
채권자들을 찾아가서 어떻게 해서든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빚에 쫓기면서도 그는 휴대폰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안 그래도 돈 못 받아서 복장이 터지는데 전화까지 안 받으면 채권자들이 얼마나 숨이 넘어가겠냐는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아르바이트로 빚을 갚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임시방편으로 일하고자 했지만 주민등록이 말소된 그를 고용해줄 정상적인 직장이 없다. 거기다가 고졸 학력에 변변한 기술 없는 40대 남성이라 노무직, 일용직도 구하기 힘들다. 심지어 공사판에 가도 제대로 된 기술이 없어 인부들의 심부름만 했다. 그래서 그는 2008년 경 주민등록을 회복하기 전에는 아르바이트 외에는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운전면허와 스타렉스 승합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직장이 구해지지 않자 목욕탕 청소 아르바이트부터 도전했다. 하지만 집에서 목욕탕 청소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40평도 넘는 대중목욕탕 청소를 하려니 시간과 힘이 엄청나게 들 뿐 잘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집의 목욕탕을 연습 삼아 청소해보려 하자, 부인이 "그렇게 막 하면 돼? 순서를 정해야지!" 하고 말했다. 집 청소를 연습해보면서 목욕탕 청소 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새벽에 신문 배달과 저녁 목욕탕 청소를 하고 한 달에 150만 원 남짓을 벌었지만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기자 다시 음주와 도박에 빠졌다. 점점 집에 술에 취한 채로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지고, 한번은 이틀 밤을 화투장을 들고 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전기와 가스가 나가 컴컴한 거실에서 흐느껴 우는 부인을 발견하고는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고생하고 있다고 다시 깨달았다. 그 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전기장판이 작동하지 않자 방이 매우 추웠다. 3일 뒤, 그는 니퍼를 가져와 스스로 송곳니 2개를 뽑았다. 이 정도로 혹독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과거의 자신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피가 철철 나고 눈물이 흘러서 한참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나약해질 때마다 뽑은 송곳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졌다. 생전 그가 잘 웃지 않았던 이유였다. 매일 아침 이를 닦을 때 혀로 빈자리를 훑으며 의지를 다시금 다졌다. 그때부터 그는 아르바이트도 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혹여나 나쁜 습관들이 다시 도질까 아르바이트 개수를 늘려서 몸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는 7개로 늘어났다. 목용탕 청소, 떡 배달, 신문 배달, 학원 차량 운영, 폐지 줍기 등 근면과 성실, 시간 엄수를 무기 삼아 하루 24시간 중 2시간 잠을 자고 22시간 노동을 했다. 신문 배달 70만 원, 목욕탕 청소 60 ~ 80만 원, 학원차 운전 70만 ~ 80만 원, 떡 배달 150만 ~ 180만 원. 여기에 신문 판촉 수당 및 폐지 판돈을 합치면 세후 450만 원 정도 생겼고, 스타렉스의 유류비가 100만 원 정도 들어서 남은 돈은 350만 원이다.
빚 갚기 직전에는 550만 원이었다. 사우나 청소 60만 원, 도시락 60만원, 학원차 운전 60만 원, 신문 속지 작업 30만 원, xxx 신문 발송 80만 원, 신문 배달 3곳 합쳐서 100만 원, 전단지 배포 30만 원, 떡 배달 70만 원, 신문 판촉 수당 30만 원.
방송에 출연하던 날은 4개의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실제로는 요일에 따라 아르바이트가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1주일을 통틀어서 7개를 한다. 아르바이트를 많이 할 때는 10개도 했다.
차량을 사용한 아르바이트가 많기 때문에 하루 400km 정도를 이동했다. 전주에서 군산까지 떡배달을 할 때 졸음운전을 했다가는 큰일나므로 차 위에 올라가서 몸을 흔들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의 방법으로 잠을 깨웠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운전하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2009년에 GM대우가 경영난으로 떡 배달 계약을 해지했을 때도 그는 곧바로 다른 아르바이트로 대체하는 등 절대 쉬는 법이 없었다. 그 외에 폐지 수집으로 부수입도 올렸다. 예상보다 아르바이트가 30분 정도 빨리 끝날 때면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팔았다. 월 2톤 가량 주워 월 20만 원 정도를 받았다.
결국 2008년 10월 29일 마침내 10년에 걸쳐 3억 5천만 원의 빚을 모두 갚았다. 그는 마지막 빚을 송금하면서 오열했다. 빚을 다 갚았다는 기쁨도 있었겠지만, 빚을 만든 것에 대한 후회, 10년 간 말 그대로 '쉬지 않고' 일했던 역경, 사업을 하던 시절 생각 등으로 온갖 감정이 몰아쳤을 것이다.
깜깜한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다가 넘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무릎을 붙잡고 주저 앉아 울기도 했다. 죽도록 고생만 하고 돈 한 푼 못 받은 채 잘린 적도 부지기수. 추운 겨울 젖은 신발을 신고 배달을 할 때에는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처음 2년 동안은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게 3년 정도였다. 그러다 2004년 쯤부터 떡집 공장 주인 아주머니가 후에 그의 딱한 사정을 알고 아침밥을 떡으로 주기 시작했다. 그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식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밥먹는 것과 아르바이트 시간 엄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그는 항상 후자를 선택했다.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은 후 달리면서 컵라면을 먹은 결과 제시간에 도착한 적도 있다.
컴퓨터를 거의 모르다 보니 모든 아르바이트 구인 정보는 생활 정보지에서 얻었다. 아르바이트의 특성상 언제든지 일감이 떨어져서 잘릴 수 있기 때문에 생활 정보지를 보면서 조건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르바이트 장소는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잡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떡 공장, 학원, 목욕탕 모두 그의 승합차로 5분 이내 거리에 있었다.
5살 연상의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10년 동안 버는 족족 빚을 갚고 생활비에는 한 푼도 보태지 못했는데도 10년 넘게 가족이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씨는 자신을 구해준 건 가족이라고 말했다. 아들은 공부를 잘 해서 재수를 해 가며 서울로 대학을 가려고 했지만 당시 사정으로 수포로 돌아가 고졸이 되었다. 경기도 광주에 자리를 잡은 아들은 가끔 와 아버지가 지내던 거처의 냉장고도 채워주고 다달이 용돈도 부쳐주며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가끔 아들에게 대학 못 보낸 미안함을 내비치면, 요즘 대학교 대학원을 나오고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며 자기는 제 밥벌이는 하고 있으니 너무 미안해 마시라고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한다고 했다.
아내는 사업이 망한 후 아침밥을 줄 때 반찬 없이 밥만 주었다. 그러나 노력하는 것을 보고 차츰 반찬을 늘려주었다. 계란말이가 나온 것을 보고 아내가 자신을 어느 정도 용서했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내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과 결혼했기 때문에 미안함이 더했다고 한다. 위에 언급했듯 빚 때문에 처갓집 땅마저 팔아야 했다.
이 씨는 10년 동안 3억 5천만 원이란 빚에 시달렸던 이유도 1억 원의 빚을 우습게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집 값이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빚을 갚지 않고 버티다가 빚을 키우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집을 줄이고 사업 규모를 줄이고 먹고 자는 것을 줄여서라도 빚은 최대한 빨리 갚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단순히 생활비를 아끼고 지출을 줄이는 것으로는 거액의 빚을 갚을 수 없다. 차를 가지고 다니니 기름 값이 나갔고 일을 하자니 밥도 먹어야 했다. 이 때문에 이씨는 술을 끊어야 했다. 한 달 용돈은 2만 원만 썼다. 옷과 신발은 주워다 입었다. 길에서 주운 전기장판을 썼는데 합선되어서 불이라도 날 까봐 노심초사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취미 생활은 신문이나 글을 읽는 것이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신문 배달하러 가는 30초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신문 헤드라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익혔다. 차가 신호에 걸릴 때면 작은 책을 틈틈이 읽기도 했다.
두 식구는 10년 간 보증금 1천만 원에 월 20만 원짜리 월세방에 살았다. 집이 좁아 가재 도구 사이에 끼여 불편하게 자야 했다. 빚을 다 갚고 나서 돈을 모아서 4천만 원 짜리 전세방으로 이사를 갔다.
그 후에도 "내 몸이 편안하면 다시 옛날에 방탕했던 모습이 나올까 봐 일을 포기를 못하겠어요"라면서 7개의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며 연 5000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2009년에는 3억 5천만원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당연히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몸이 남아 날 수가 없었고 결국 2012년에 대장암으로 쓰러진 뒤 2014년 2월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몸을 돌보지 않는 극단적인 노동도 결국 몸에 해롭다는 것을 다시금 증명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족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애도해 주었다.
사실 첫째로 지적되는 원인은 그가 2008년 경까지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두번째로 그는 장기간에 걸쳐 식사를 불규칙하게 했다. <3억 5000만 원의 전쟁>에 따르면 그는 아르바이트 시작 이후 처음 몇 년은 쏟아지는 잠을 억제하기 위해 저녁밥도 굶었다. 포만감에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하루 스케줄에는 식사 시간이 따로 없었다. 늘 굶거나 급한 대로 밥을 물에 말아서 대충 먹었다. 식사를 하느라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 굶더라도 시간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직장에서 공짜로 주는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며 빈속을 채우거나, 심지어는 다음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동하는 동안 뛰면서 컵라면을 먹기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대장암은 적은 수면과 관계가 아주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으나, 고인의 아들은 언론이나 출판사에 자세한 언급을 거부했다.
이종룡씨의 인생관
1. 망했다고 생각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 빚이 있으면 철저히 절제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3. 신용은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4. 신용과 신뢰는 시간 엄수에서 나온다.
5. 하찮은 아르바이트라도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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