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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제의 역사

by @#$*&! 2020.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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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사

이복지간인 고구려 건국 세력에 밀려 부여권 일대에서 해상으로 피난한 온조 부족이 기원전 18년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십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삼한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부족국가 연맹체다.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초창기에는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도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부여 계통의 온조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십제국(十濟國)이 마한에서 세력을 확대하기에 이른다.


십제국은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 및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되며 4세기부터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4세기 중엽에는 전라도 부족국가 일부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굴복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538년 성왕 시절에는 수도를 웅진(熊津 :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사비성(泗沘城 :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옮기고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余)로 변경하였으며,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되찾았으나 신라의 전술로 인해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였고 결국 성왕은 관산성에서 사망하였다. 국력이 계속 약화되며 영토가 수축하다가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했다. 그 후 부흥운동이 일어나 왜국의 인질이었던 풍을 임시왕으로 추대하며 투쟁을 이어갔지만 서로를 믿지 못해 내분이 발생하면서 3년 만에 전멸하였다.


백제 초기

 
신라계 대학자인 고려 김부식의《삼국사기》기록에 실린 온조 설화에 따라 기원전 18년에 부여 계통의 이주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민의 결합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추모왕과 소서노의 아들이며, 최초의 이름은 십제였다. 철기 문화를 보유한 부여 부족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설화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와 온조가 남으로 피난한 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으나, 곧 비류가 자살하자 주민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겼으로 비로소 십제(十濟)가 건국되었다. 혹은 구태가 건국 했다는 구태설화도 전해진다.
당시 한강 지역은 직산-천안을 중심으로한 목지국이 다스리던 마한의 영토로서, 100리의 땅을 할애받아 십제를 세우고 미추홀과 연맹을 형성했다.
그러나 설령 부여에서 한 부족이 이주하여 백제를 건국했더라도 인구의 주축이 토착계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한강유역의 재래 집단에 고구려계, 부여계, 옥저계, 예계 부족이 합류하였을 수 있지만, 신라계, 가야계, 중국계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왜인들이 목포, 그리고 광주와 전주 일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도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기원은 부여계 뿐만이 아니었다.

246년에 진한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마한과 낙랑·대방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마한은 대방태수(帶方太守)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참패하였고 이로 인해 목지국(目支國)이 약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서 백제는 기존의 마한 54개 부족연맹체의 우두머리였던 목지국을 제압하게 된다. 3세기 중엽에서야 백제 고이왕은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고, 인천까지 영향권에 넣었다.

이후 중국과의 무역로를 확보하며 중국 문물들을 받아들인 결과, 16관등, 공복, 6좌평과 상좌평을 제정하는 등 권력 체계를 확대하여 독재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고이왕 이후 낙랑과 계속되는 싸움에서 298년에는 책계왕이 살해되었고, 304년에는 분서왕이 살해되었다.

정치적 성과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 드디어 영토가 늘어났다. 마한의 일부 국가를 병합하여 백제의 영토는 전라도에까지도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평양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자주 침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비교적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재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따른 일방적인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독자 권력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군사 활동


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을 일부 제압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북진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랴오시, 산둥, 큐슈 등과 무역을 시작했다. 양서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랴오둥 일대를 점령한 시기(397년 이후)에 백제가 랴오시로 진출하여 대륙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무척 어려운 상황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많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결국 개로왕이 사망하였다. 결국 백제는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변의 웅진으로 수도(475년)를 옮기면서 영토가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중국과 왜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간 내분이 발생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왕권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혼인을 통해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투쟁하였고, 무령왕은 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내분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한편 북제서에는 571년 위덕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임명한 기록이 있어 일부 재야사학자들과 대륙사관론자들은 이를 백제가 뤄양을 정복한 근거로 보기도 한다.
성왕은 마한 전체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여 부여 지역의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교류하였다. 또한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한강 상류를 차지하기로 약속한 신라와 다툼이 발생하면서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며,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무왕은 신라에 적폐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편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한 기회주의를 펼쳤다. 이와 더불어 절대 왕권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役事)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성을 중수했으며 고향인 전라도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遷都)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또한 정실 왕후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보시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백제 최대 규모의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했다. 신라계 대법인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서동 출신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나온다. 기존에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09년 1월 14일에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 의해 파문이 일었다. 사리함 명문에는 '우리 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지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관산성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회복되어,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숙청을 통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멸망

당시 백제를 사방에서 압박하고 있던 신라에 의해 백제의 대당 외교가 실패하자, 신라와 직접 군사 대결을 시도하여 659년 4월 신라를 공격하였다. 돌궐-고구려-백제-왜 와, 당-신라의 십자 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660년에 사비성이 함락되고, 부흥군도 순식간에 전멸함으로써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고구려와의 관계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백제를 백잔(百殘)으로 비하하고 있다. 잔(殘)은 잔인하다, 흉악하다는 뜻이다.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가 수·당과 전쟁을 전개하는 동안, 의자왕(義慈王)은 백제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신라의 백제전선(百濟戰線)의 요지인 대야성(大耶城, 현재의 합천)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는 외교를 감행하였으나, 고구려가 출병의 대가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를 협공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리하여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를 치게 하였다.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등으로 하여금 백제를 진공케 하니, 당군은 백강(白江) 좌안(左岸)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 금산군 진산면)을 넘어서게 되었다.

당시 의자왕은 교만하고 향락에 젖어 있었고, 조정은 간신들이 사리(私利)를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성충(成忠) · 흥수(興水) 등 충신은 처형되었다. 백성은 거듭되는 전쟁에 지쳐 내분이 발생하고 정부로부터 이반(離叛)되어 백제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충상(忠常)이 5천의 결사대로 국운을 지탱하려 하였으나 대패하고,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660년에 멸망하였다.

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백제 유신(遺臣)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고 흑치상지 등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군사를 일으켜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왜로부터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고 사비성 · 웅진성 등을 포위 ·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반격과 부흥군의 내부 분열로 주류성이 함락되고, 이후 부흥군은 계속 패배하며 4년에 걸친 부흥 운동도 종말을 고하였다.

당나라는 옛 백제의 영토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다.


중국 왕조와의 관계


《진서(晉書)》에 따르면, 백제가 전성기였던 4세기에 근초고왕은 동진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였다[22]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투쟁하려고 하는 백제의 사대주의적 외교는 침류왕 대에도 계속되었다. 침류왕 원년 7월에도 백제는 동진에 조공하였다. 게다가 음력 9월에 동진에서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오자, 궁중에 머물게 하고 하늘처럼 대접하였다. 470년, 송 왕조 시기에도 사신을 보냈으며, 472년에는 북위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무령왕과 성왕은 양나라에 여러 차례 조공을 보내는 대가로 양나라 귀족 칭호를 하사받았다.


대륙백제 제국설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 지방을 점령하고 진평군과 진평현에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4세기부터 6세기 초 혹은 중엽까지 대략 200년간 드넓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상상은 《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 기록된 백제의 요서 지방 점령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정복했다고 서술하고 있었으나 1990년 이후부터는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진출을 부정하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환단고기 등을 지지하는 일부 민족주의 사학자에 의해 백제의 대륙 진출을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대륙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대륙백제의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가 아닌 황하와 장강 사이에 비정하면서, 대륙백제의 중국 통치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대륙 정복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대륙 정복 시기는 진(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중국을 다스릴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또한 삼국사기, 남제서 등에는 490년에 위나라(북위)의 기병이 백제를 점령했으나 다시 막아낸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대륙백제가 요서지방이나 기타 해외에 드넓은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위나라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아 인정하지 않는 편이며, 같은 기록에 백제 측의 전공으로 '선박을 쳐부순 것(拔臺舫)'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나라가 실제로 함대를 보내 대륙백제를 침공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논란이 매우 많다. 

왜국과의 관계

3세기 이전


기원전 3세기, 삼한과 고조선으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약 2000년 전에[출처 필요]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고인돌이 기타큐슈의 조몬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고인돌에 있는 특유한 간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반도와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 시대 만기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고인돌 무리가 발견됐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晩期)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 보면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4세기 이후

 
칠지도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양국은 활기차게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 당시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서기 366년(진구 황후 46년, 근초고왕 21년)[주 6] 에 이뤄졌다.[30]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십제는 본래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에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 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 섬, 그리고 규슈의 마쓰우라 반도(松浦半島)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 섬에서 오키노시마(沖ノ島),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31]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32] 되고,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33][34][35]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姓)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


스다하치만 동경


현존하는 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왜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36] 와 516년 고안무(高安茂)[37] 를 왜국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왜국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왕위를 계승한 성왕(재위 523 ~ 554년)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다.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40][41]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44] 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 ·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왜국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위덕왕(재위 554년 ~ 598년) 때에도 교류가 이어졌다. 577년(위덕왕 24년, 비다쓰 천황 6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경론 몇 권, 대대적인 학자와 율사 · 선사 · 비구니 · 주금사 등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

신라에서도 579년에 승려와 불상을 보냈다.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다.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년?~626년)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는데, 우마코도 부친 소가노 이나메의 불교 수용에 대한 유언에 따라 이 불상을 받아들이려 했다.

588년(위덕왕 35년)에 백제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

소가노 우마코는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성향을 보여, 마찬가지로 불교 수용에 관심을 보이던 쇼토쿠 태자와 연대하여, 불교 수용에 반대하는 배불파(排仏派)이자 국신파(国神派)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정쟁을 되풀이한 끝에 승리를 거두어 오무라지(大連)인 모노노베 씨를 타도하고 중앙 권력의 정점에 섰다. 모노노베 씨는 백제에서 불교까지 들어온다면 자기네의 선주(先住) 신앙과 조정에서의 세력이 더욱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602년 관륵(觀勒)이 일본에 건너가 천문 · 책력 · 지리 · 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

 
백제의 패망과 왜의 참전


의자왕 13년(653년) 백제는 왜와 우호를 통하고 동왕 16년(656년)과 17년(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진배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하여 660년 멸망하였다. 이후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은 부여풍을 임시왕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하면 풍은 631년 인질로서 왜국에 30년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 고 적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 고 기록한다. 부흥군과 부여풍은 왜의 원병을 요청했다. 왜는 병력과 물자를 원조하였다. 663년 8월,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풍의 내분이 격화되어 결국 풍이 전라도에서 복신을 살해한 뒤, 풍은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귀실복신의 죽음으로 부흥군 지도부가 분열하고 있을 때 신라는 서둘러 부흥군을 진압하였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대왕이 이끄는 정예군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태자였던 부여융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노병들이 진을 쳤고, 바다에서는 왜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선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참패했다. 게다가 다른 한쪽에서는 왜의 수군이 신라군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격퇴됨으로써, 선박 건조 기술이나 수군의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당시 왜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는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백제는 왜국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왜국의 귀족층에는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이 많이 있었다. 백제를 일본어로는 "구다라"라고 하는데,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풍의 남동생·선광의 자손은 왜국 조정으로부터 구다라노코니키시의 성을 받아, 왜의 귀족이 된다. 간무 천황(재위 781년~806년)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가사는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을 조상으로 하는 도래인 야마토씨의 출신이다. 일찍이 열도로 망명한 백제인들은 현재의 오사카시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일본어: 百濟洲 쿠다라스)라는 마을을 만들었다.

국호

기록상 백제는 나라 이름을 몇 차례 바꾸었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백제의 국호는 십제(十濟)이다. 그러다 온조왕(溫祚王)이 형인 비류(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다. 한편 중국 측의 역사서인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처음에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백제의 국호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의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 16년, 538년에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며,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꿨다. 다만 남부여라는 국호가 멸망 때까지 사용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1995년에 발견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서 “백제창왕(百濟昌王)”이라는 표현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했음에도 바로 다음 왕인 창왕, 즉 위덕왕대에 와서 다시 백제(百濟)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성왕의 의도가 위덕왕대에 부정되고 있었던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중앙 관제


관서는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나뉘어 총 22부가 있었다. 
내관에는 전내부(前內部)·곡부(穀部)·육부(肉部)·내경부(內𢈴部)[주 1]·외경부(外𢈴部)[주 2]·마부(馬部)·도부(刀部)·공덕부(功德部)·약부(藥部)·목부(木部)·법부(法部)·후궁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왕실·궁내에 속하는 관서였다. 
외관에는 사군부(司軍部)·사도부(司徒部)·사공부(司空部)·사관부(司冠部)·점구부(點口部)·외사부(外舍部)·조부(綢部)·일관부(日官部)·시부(市部)가 있었다. 이들은 일반 정무를 담당하였다. 종래의 족장 선출의 유풍이 남아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되었다.


행정 구역


지방 행정은 원래의 부족 세력과는 전혀 무관한 방위로 표시하였다. 성왕 때 수도를 5부[주 3] 로 구분하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었다. 방 밑에는 10군을 두었으며, 방에는 장관격인 방령과 차관격인 방좌를 두어 통솔케 하고, 군마다 3인의 장이 있어 700~1,200명의 사졸을 거느리게 하여 국왕의 호족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밖에 전국 22개의 행정구역에는 왕자·왕족을 살게 했으며, 이를 ‘담로’라 하였다. 

경제


삼한 시대 때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직조술 ·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무기·불상 등 금속공업도 가능해졌다. 왕토사상이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를 썼으며 조세는 조를 쌀로, 세는 포목, 비단 실과 쌀을 내었고, 재앙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중국 남부 및 왜와 교역이 성행하여 왜에 말 ·누에 ·직조법 ·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무역항으로는 영암성이 번성하였다. 

사회

  
백제의 언어와 풍속은 고구려, 신라와 큰 차이가 없었다. 활쏘기를 좋아하는 점에서 고구려와,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신라와 유사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참수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었고, 한문과 관청의 세무에도 밝았다. 음주, 바둑, 장기는 삼국의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한학


오경박사·의박사·역박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472년 북위에 보낸 국서가 《위서 (역사서)》에 실려 있다. 또한 541년 양나라 사신 육허가 와서 을 강의하였으며,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와 근구수왕 때의 왕인이 왜에 한학을 전하였다. 무령왕 때는 단양이·고안무 등이 왜에 유학을 전하였다. 백제의 첫 역사서는 375년에 고흥이 편찬한 《서기》이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의 역사책도 있었다고 하나, 모두 잃어버렸다. 
주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응유 사람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며, 고전이나 역사서를 좋아한다. 그중에 준수한 자는 꽤 능숙하게 문장을 짓고 음양오행을 이해하고 있다.


종교


《주서》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13]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불교는 384년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 응유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위덕왕)에 착공해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는 호국사찰이다. 599년(법왕 1)에는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강제로 불태운 적도 있었다. 백제의 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와 신선 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한 낙랑·대방의 중국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역사서인 〈서기〉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두면서 유교를 장려했다. 

건축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7세기 신라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할 때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19]과 왜국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과 기술자 등이 건너간 사실에서 백제의 봉사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이 건축된 기록은 있으나 고려시대에 파괴되었으며,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등만 남아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아한 곡선으로 안정감을 주며 백제의 석탑 중에 가장 우수하다. 
조각품으로는 석불과 금동불, 불상 등이 있다. 말기에는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이 많이 남아있다. 무령왕릉에서는 사대주의를 반영하는 듯 양나라 유물이 출토되었다. 
묘는 시체를 가매장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발굴하여 뼈를 씻고 장례한 후 다시 매장하는 복장이 가능한 석실묘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이며, 웅진시대의 공주시 송산리 고분은 굴식 돌방 고분이다. 
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석수·청동경·자기·지석·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 백제의 사회,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과, 특히 신라와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고분이다. 
또 사비시대의 부여 능산리 고분은 굴식 돌방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기술과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가 세련되었다.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은 화강암에 새긴 마애석불인데, 화려한 옷차림, 짙은 미소를 띤 온화함은 ‘불교의 미소’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금동관세음보살입상, 무령왕릉의 출토품인 금제 관식 ·석수 ·동자상, 금은 장식품인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이 유명하며 산수문전 ·연화문전 등과 기와 등에도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데, 고구려의 와당은 힘과 정열(와당의 귀신상)을 표현한 데 비하여 백제의 와당(기와의 막새나 내림새의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은 연약함이 특색을 이룬다. 

예술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가 우아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왜국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를 그린 아좌태자와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을 남긴 하성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해서체) 등이 있다. 
음악은 5∼6세기에 남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 음악이 적혀 있고,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왜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 ·각 ·공후 ·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의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에서 배운 음악을 왜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작자 ·연대가 미상인 《정읍사》가 《악학궤범》에 전해지며, 노래의 제목만이 《고려사》 에 전해지는 것으로는 《지리산가》 《무등산가》 《방등산가》 《선운산가》 등이 있다. 

교류


백제는 후기부터 양을 비롯한 남조의 각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다. 양나라에는 조공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양의 문화를 수용하였고, 이렇게 받아들인 종교와 문화는 왜국에 전파되어 아스카 문화가 시작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는 아직기·왕인 등이 왜국에 한학과 유교를 전했으며, 특히 왕인은 〈천자문〉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오경박사가 왜국에 조공사절단으로 파견되었으며 기술자인 봉녀·야공·양주인을 비롯해 와박사·조사공 등의 건축자도 꾸준히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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