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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 전쟁영웅 을지문덕

by @#$*&! 2020.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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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쟁영웅 을지문덕

성 : 을지(乙支) , 이름 : 문덕(文德)

생몰년 : 미상 , 사당 : 청천사(淸川祠)

국적 : 고구려 , 주군 : 영양왕(嬰陽王)

직위 : 대신(大臣) , 출신지 : 고구려 평양

 


고구려 영양왕 대에 활약했던 전쟁 영웅이다. 여수 전쟁 당시에 고구려를 침략해온 수양제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낸 명장으로 유명하다.

당시 수나라는 최강대국이었는데 이런 수나라가 1차 침공 당시에는 30만 명, 2차 침공 당시에는 전투병만 113만 명에 보급 및 기타 병과를 포함하면 300만 명 가까이 되는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했다. 한마디로 수나라와 고구려 두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명대전이었는데 을지문덕은 이런 거대한 회전(會戰, pitched battle)에서 대승을 거둬 고구려는 물론 남쪽의 한반도 국가들을 벼랑 끝에서 구하는 전쟁 영웅이 된다. 이후 오랜 전란을 끝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거대한 수나라는 서서히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다.

을지문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을지문덕의 출생지와 가문의 계보 등이 불확실해서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조선시대의 지리서인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기록이 맞다면 을지문덕은 평양 출신이었던 셈이다. 현 행정구역으로는 대한민국 이북 5도 기준 평안남도 강서군 적송면 석삼리 북한 행정구역상 증산군 석다리에 비정된다.

고대 한국의 남은 기록은 정책은 커녕 임금의 이름조차 기록이 뜸할 정도로 부족한 실정이고 고구려의 역사서는 현존하는 것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중국의 역사서를 검토해 봐야 하는데 중국 역사서에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수 양제가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밀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 양제는 이미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추론이 가능하나 아마도 중국인 입장에서 굳이 중국의 기록에 자신들을 물리친 을지문덕에 대해 기술할 이유가 없었고 이민족의 영웅에 대해 자세히 기록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상세한 기록을 하지 않은것으로 추측된다.

을지문덕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그의 출생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1979년 고고학자 김원룡 교수는 전해종 박사 화갑기념논총에서 을지문덕의 가계가 이주민 계통의 귀화 가문일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을지문덕의 성씨인 을지(乙支)가 선비(鮮卑) 귀족의 성씨 가운데 하나인 울지(尉遲)와 음가가 비슷한데서 그가 귀화인이거나 귀화인의 자손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데 울지씨는 본래 선비족 탁발부(탁발선비)와 함께 북위를 건설하는 데 공헌한 울지부의 성씨이다. 

실제로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에 울지 성씨를 가진 이들의 활약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이 시대를 다룬 중국 역사서에 울지씨는 울지강(尉遲鋼), 울지형(尉遲逈), 울지경덕 등 여럿이 보이는데 을지문덕의 집안인 울지씨 가문은 580년에 수문제 양견이 찬탈을 꾀할 당시에 울지씨 출신의 울지형이 이를 막다가 죽자 화를 피하기 위해 고구려로 망명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원룡은 을지와 울지의 발음이 비슷한 점, 자치통감 고이 8권의 주석에 을지문덕을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고 했던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으며 고구려의 귀족 가문이었던 을(乙)씨에 고대 한국어에서 존칭사로 쓰이는 지(支)를 붙여 을지문덕의 이름이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몇몇 야사에서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국상이었던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을지문덕의 후손인 목천 돈씨의 가보에 의하면 원래 을씨였다가 을지문덕 전후로 을지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로 을지씨를 계속 쓰던 후손들이 고려 시대에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때 의병으로 공을 세워 평양 근처 돈산 일대를 식읍으로 받았고 돈씨로 성을 바꿨다. 이처럼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해서는 견해가 충돌하는 편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홍양호은 자신의 저서인 해동명장전에서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한다. 다만 홍양호가 해동명장전을 쓴 시기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지 한참 후인 조선 후기였으며, 참고한 자료가 쓰여있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평양 일대에 전해지던 을지문덕에 대한 전설을 옮겨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규보의 에서는 명나라 장일규가 찬(撰)한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을지문덕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확언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본기에도 을지문덕을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대신이란 관직명은 아니다.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비단(白羅)으로 관(冠)을 만들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둘렀다. 대신(大臣)은 푸른 비단관(靑羅冠)을 쓰고, 그 다음은 진홍색 비단관(絳羅冠)을 썼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 후기 귀족 계급의 관모는 소골(蘇骨)에서 발전한 관모로서, 왕(王)과 대신(大臣) 그리고 신(臣) 등 계급 간의 구별을 좀 더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을지문덕의 관직은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대신이라 했으니 고위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평안도 일대에서 구전돼 온 야사로 을지문덕의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을지문덕의 아버지가 을지문덕이 태어났을 즈음 명망 높은 도인에게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를 물었는데, 그 이름을 '문덕'이라고 지으라 하자 그 아버지가 '제 미천한 아들에게 어찌 문덕 선관님의 이름을 붙인단 말씀입니까'라며 거절했고, 이에 도인이 '이 아이는 훗날 고구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아이이니 반드시 아이의 이름을 문덕이라 하되, 자라면 무예를 가르치라'고 말해, 아버지는 결국 도인의 뜻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문덕이라 지었는데 정말로 고구려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후대 각색'의 형태를 띤 야사이고, 을지문덕에 관한 자료는 고구려-수 전쟁 이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여 신빙성은 0에 수렴한다.

을지문덕은 그 엄청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출생과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무하여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수나라와의 전쟁에 나타나 수군을 끔살시키고 종전 뒤에는 다시 종적을 감춘 것이다.

국내에는 을지문덕에 대한 독자적인 전기조차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긴 하지만 《수서》의 우중문·우문술전과 《자치통감》의 관련 내용을 조합하여 만든 것에 불과하다.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래도 귀족연립정권 체제 내에서 한 나라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외교 협상권을 갖출 정도였으면, 당시 귀족 내부에서도 최고위 직책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수양제가 수하 장수들에게 을지문덕을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밀명을 내린 걸 보면 외국에서도 그 이름이 잘 알려졌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문제는 왜 이 정도의 인물에 대해 생몰년도는 커녕 당대 인물들을 언급할 때 대부분 적시하는 출생지마저 기록이 없냐는 점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을지문덕이 전쟁 당시 높은 벼슬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문이 정말 한미했거나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곳이었다는 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상당수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위의 타국, 타민족 출신이라는 설과 일부 통하는 점이 있다. 대귀족 가문들이 언제나 득세하고 관직을 차지하던 당대 고구려에서 관리가 출신 '부(部)'를 표기하지 않는 것도, 생몰년도도 기록되지 않은 것도 집안 배경이 워낙 없었던 탓이라는 것. 집안 대대로 높은 관직에 있었으며, 그 출신과 연고지에 대해 상당 부분 추적이 가능한 연개소문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이 어떻게 귀족이 아니면 대접 못받는 세상에서 그 정도의 지위에 올랐는가? 이에 대해서는 평원왕대부터 고구려 왕들이 추진한 신진세력 등용 정책 덕분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한 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수혜자가 바로 온달이다. 그러나 이 설 또한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목천 돈씨(頓氏)의 돈씨가보에서는 고구려의 명문가인 을씨(乙氏)가 을지문덕의 대에 와서 을지로 성이 바뀌었다가 묘청의 난 때 을지수(乙支遂).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삼형제가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지고 돈뫼(頓山)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곳에 정착해살면서 돈씨를 성씨로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해당 인물에 대한 다른 기록이 없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돈씨의 연원이 다르게 기록되어있으며 족보에만 나오는 가문의 연원은 부풀려지는 경우가 흔하기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본다. 단재 신채호는 이 족보 기록과 일본인 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의 "퉁구스어로 사자(使者)를 '일치'라고 한다"는 지적을 근거로 을지문덕의 '을지'는 관직명이고 고구려 때의 관직인 울절(鬱切)이나 삼한의 읍차(邑借)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주장했다.

이름인 을지문덕에서 성으로 여겨지는 을지(乙支)는 논란이 좀 있다. 乙(을)은 고대어에서 '이리'라고 읽혔으며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支(지)는 관직명인 대막리지(大莫離支),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씨'와 같이 일종의 존칭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을지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존칭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지(支)를 '이공순신(李公舜臣)'의 공(公)과 비슷하게 쓰인 것으로 보고 성을 을(乙)씨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몇몇 야사에서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적기도 한다.

支(지)의 발음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그 자음이 c 혹은 ch로서 당시의 자음에는 없던 발음이라 ㄱ, ㅅ, ㄷ 등으로 한국에 전래되었다. 그래서 을지의 원래 발음은 '이리기' 혹은 '이리시(이리씨)'로 읽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왕"을 쿠다라노코니키시(くだらのこにきし)라 불렀는데, 이 중 코니키시라는 말이 건길지(鞬吉支)의 당대 발음인 것으로 추정되어 백제에서는 접미어 "지"가 시로 읽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제의 곤지(昆支)와 직지왕(直支王)의 경우 코니키, 토키오우로 훈하고 있어 지(支)가 시로 읽혔다고 확정할 순 없다. 신라, 가야 지도자층의 호칭인 간지(干支)의 이표기로 한기(旱岐)가 있으므로 支(지)는 기로 읽혔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그와 관련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제2차 고구려-수 전쟁 당시다. 고구려의 총 지휘관으로서 맹 활약하며 수나라군을 대파, 고구려를 승리로 이끈다.

우중문이나 우문술이나 크게 눈에 띌만한 전략, 전술적 오류를 저지른 적은 없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요동-압록 방어선을 일시에 돌파하여 평양에 육박하여 수군에게서 보급을 받고, 평양성을 공격하려는 전략을 짰고, 일단 수의 별동대는 전투없이 성공적으로 요동-압록 방어선을 돌파했다. 일단 평양 인근까지 육박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위풍당당하게 고구려군을 물리쳤다고 생각하면서 도착해보니, 보급을 맡았던 그놈의 수군이 쫄딱 망해버린 것이다. 별동대가 도착하길 기다렸으면 되는데, 무리하게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말아먹은 내호아의 과오가 더 크긴 하다.

물론 살수대첩의 의미는 내호아의 수군 격퇴시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30만 별동대 자체만 해도 당시 을지문덕의 군대가 상대하기는 버거운 군세였다. 그래서 만약 별동대가 파견되기 이전에 내호아의 수군이 격멸당했다면, 이는 보급이 끊긴 적군을 끌어들여 섬멸하려는 유인작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호아의 수군 패배 시점이 별동대 파견 이후의 시점이라거나 혹은 수군이 잔존해 있었다면 고구려군이 잦은 교전을 펼친 것은 수군과 별동대가 접선하여 군량 보급이 이뤄지기 전에 수나라 군대의 전진을 지연시켜 되돌려보내려는 의도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어찌되었건 수군과 별동대가 접선하기 전 수의 수군은 물러났고, 별동대는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고립되었다가 후퇴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며 별동대를 괴롭혔고, 결국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다다르자 고구려군은 전력을 다해서 총공격을 가하였다.

강을 건너느라 수군이 반으로 나뉘었던 시점에서 고구려군이 맹공을 가했고, 수의 군대도 이를 예견하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후위를 맡아 방진을 치고 저항하였지만, 지친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후위의 붕괴에 동요한 30만 대군이 연쇄적으로 우르르 무너졌다. 설세웅은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고, 왕인공이 일시적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추스려오지는 못했고 30만 5,000명 중 압록강에 다다른 병사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2,700명도 건제를 유지하고 철수한 것이 아니라, 하루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도망쳐 왔다는 사서의 기록을 볼때 갑옷이고 창검이고 다 팽개치고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친 오합지졸 패장병 수준. 특히 수나라의 제8군은 전사한 지휘관 신세웅을 포함하여 모두 궤멸했다.

- 북한의 기록

북한의 기록은 우리와 달리 살수대첩이 있었던 수나라의 2 고구려 침공(612)으로 쌍방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 북부지역이 아니라 모두 지금의 압록강 이북, 중국 요령성 일대라고 기록되어있다. 살수대첩의 현장인 살수(薩水) 현재 평안남북도를 남북으로 가르며 황해로 흘러드는 청천강이 아니며, 전사에 등장하는 평양성이나 압록수도 지금의 평양이나 압록강이 아니라는 것이 북한의 해석이다.

북한 통사인 『조선전사』 3(1979) '고구려사' 따르면 살수대첩의 살수는 현재 요동반도에 있는 대양하(大洋河) 지류인 소자하이다. 또한 수나라 별동대가 평양성을 향해 떠날 건넜던 압록수는 소자하 위쪽에 있는 오늘날의 태자하 하류(일명 오렬수)이며,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평양성도 압록강 북쪽에 있던 봉황성(현재 봉성)이었다.

당시 고구려에는 수도 평양 외에 평양의 북쪽(북평양) 남쪽(남평양) 각각 부수도(副首都) 가지고 있었는데 봉황성은 북평양이었고, 봉황성이란 "임금이 있는 "이라는 뜻이며 고구려 왕이 있던 왕성이었기 때문에 수나라가 이곳을 평양(수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1 평양에서 발간된 『력사사전』 2권에는 살수가 청천강으로 되어 있다.

- 여당 전쟁 이후의 을지문덕


고구려-수 전쟁 이후에 을지문덕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이전의 사서들이 그렇듯이 고구려의 사서들이나 기록물들이 이후의 전란에 의해 평양성과 국내성 일대가 황폐화 되면서 대부분 불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신라에 상당수 고구려인들이 유입되었고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한 발해에서도 당연히 구국의 영웅으로 여겼을만큼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오는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해놓은 역사 기록들이 어느 정도 있었을 테지만 이마저도 후삼국시대와 여요전쟁 등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상당수의 역사 자료가 소실되었고 결국 을지문덕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궤적에 대해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삼국사기가 편찬 되었을 당시에 이미 당대의 기록들이 부실하고 특히 고구려 후기는 더 부족해서 중국 측 사서를 빌려써서 조공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이처럼 을지문덕도 기록이 거의 없었던 듯 하다.

그래서 을지문덕의 출생과 마찬가지로, 수나라와의 전쟁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고구려-당 전쟁 당시의 대단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안시성주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자 을지문덕은 신라로 설인귀는 거란으로 망명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설화는 설화일 뿐이다. 애초에 댓구가 되는 설인귀부터 강주 용문 사람으로 원래 오리지널 중국인으로 당나라에 그냥 임관한 것이므로 망명하고 말고할 문제가 아니었으니, 을지문덕 역시 이야기의 아귀가 안 맞다. 무엇보다 을지문덕 정도 되는 인물이 신라건 당이건 망명을 했다면 그건 무조건 기록된다. 그러나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라 알 길이 없다.

현재로서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간혹 드라마나 소설에서 연개소문과 을지문덕이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역사적 증거가 없는 허구이다. 다만 개연성이 완전 없지는 않은데 고구려 연씨가문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와 그의 아버지 연자유가 2대 연속 막리지를 역임한 명문가이자 권신가문이기 때문이다. 승전한 총사령관이었으니 그들과 만나지 않았을 리 없으며 그리고 시기상 을지문덕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세대이니 개연성은 충분하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보니 알 수 있는 게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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