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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치인 김종인 - 동화은행 뇌물 수수사건

by @#$*&! 202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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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김종인 - 동화은행 뇌물 수수사건

대한민국의 진보 사회주의 정치인이다. 현재 국민의힘 소속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제11, 12, 14, 17, 20대 대한민국 국회의원(모두 비례)을 지냈으며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양당에 모두 영향을 끼친 진보 정치 원로이다. 경제민주화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는 사회주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이 그의 할아버지다. 김병로는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로서 독립투사들을 무료변론했던 인물이었다. 대한민국 수립 초기 정당활동(한국민주당)까지 했던 조부의 유산 덕분에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재벌개혁을 이야기 하면서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수수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부였던 김병로 선생님께서 김종인에게 "너는 절대로 정치에 뜻을 두지말고 학문의 길을가라." 라고 하였으나 이를 따르지 않아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 라고 하였다.

군사정권 시절 동화은행장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죄를 시인하였다. 

 

2010년대 들어 정치계에서는 보수와 진보 상관없이 어려운 일이 불어닥치면 거의 해결사 혹은 킹메이커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 어려움이 있을 때 정치인들이 김종인을 찾아 도움을 구하고는 했으나 독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김종인의 회고록이 출간되었는데, 회고록에서 자신이 도왔던 박근혜와 문재인 두 사람을 모두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박근혜 에게는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데다 자기 뜻대로 안 이루어지면 화를 내고, 동네 건달식 정치를 한다" 고 비난하였고 문재인은 "천하가 자기 것인 줄 알고 방자하게 굴고 겉과 속이 다르며 주변 인간관계가 복잡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노무현이 지나치게 우클릭을 한다며 노무현을 비난하기도 했다.

김종인은 박근혜를 통해 자신의 숙원인 경제민주화를 이루려 하였으나 김종인의 경제민주화 정책은 너무 급진적인 진보정책이기 때문에 박근혜 당선 이후 좌클릭을 하기는 하였으나 김종인의 뜻대로 급격한 진보정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김종인식의 급진적 경제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별하였다.

미국, 독일의 주요 정치, 경제계 인사들과 인연은 물론, 친척들 역시 한국 경제계의 이곳저곳에서 활약 중이다. 미국의 공화당, 과거 서독 측 인사들과 연줄을 유지하고 있다. 레이건 때 국무장관 조지 프랫 슐츠와 가깝다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 당시 연줄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던 한국 정계로서는 김종인의 역할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종인의 꿈은 한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을 만들자는 시장경제주의라고 주장하나 그 내용은 증세와 규제 일변도의 정책들이라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다.

재벌 해체를 주장하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 김종인의 생애


1940년 7월 11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서 태어났다. 면암최익현의 부대원으로 을사의병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의 손자이며,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김재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큰 어머니 고귀현을 통해 동아일보 가문과 연결된다.

다섯 살때(1944년)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할아버지 김병로는 ‘너는 아버지가 안 계시지만 그래도 너를 돌봐 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지 않으냐. 조금도 외로워하지 말고 공부 잘하여 세상을 떳떳하게 살아가면 밥 굶는 일은 없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1959년 서울 중앙고등학교(49회)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어과를 1963년 졸업했다. 그해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통합을 주도하던 조부 김병로의 비서 역할로 정계와 연을 맺는다.

1964년 조부가 별세하고 나서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유학했다. 1969년에는 뮌스터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1972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부전공분야는 재정학(공공경제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과 달리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독일에서 공부한 덕에 경제민주화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973년 3월 귀국해 불과 32세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김종인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고. 이 때문에 서강학파로 분류되나 선성장 후분배, 재벌 육성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장을 주장해온 남덕우 등 서강학파 선배들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2세대로 구분된다. 유신 때부터 박정희 정부에서 정책자문역할로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해, 김재익과 함께 서독의 부가가치세를 배우러 출장을 다녀와 연구보고서를 올렸다. 이미 35세 노총각이던 김종인은 십수번 선을 봤으나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이듬해에 김재익의 중매로 김미경(金美經) 교수와 결혼했다. 말이 잘 통했다고.

김미경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의 딸로 2018년 현재 이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이고, 처삼촌이 박정희 정권에서 재무부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이다. 본인의 4촌 처남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 건설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이진설이 있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윤영철이 있으며,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택돈이 있다. 

1977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신현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료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하는데 기여했다. 김종인은 자신이 했다고 자신하고 있고, 직접 당사자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역시 김종인이 제안한 게 맞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1980년 국보위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전두환,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 점 때문에 전두환의 소위 부역자 취급을 받았다.  

그 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1987년 민주화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해 관철시켰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1989년 1월부터 7월까지 국민은행 이사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9년 7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1990년 3월부터 1992년 3월까지 2년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만둔 후 1992년 제14대 국회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1993년에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결국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총리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지만 막상 당선 후 없던 일이 됐다. 그래도 청와대로 불러 미안하다고 말은 했다고. 본인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2008년 김종인은 경제정책에서 우클릭만 거듭한 채 끝난 참여정부에 대해 비난을 하였다.

"좌파신자유주의? 말장난이냐. 신자유주의는 실패한다. 노무현 정부가 무슨 좌파 정부냐? 기업한테 정부 기능을 기대하지 말라" 라고 인터뷰하였다.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2004년 3월에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되었으며, 제17대 국회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행적으로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당적은 유지했지만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그냥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정동영의 대선 후보 등록 회견 때부터 손잡고 옆에 서 있었다.


2008년에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다시 야인으로 있다가 2011년 12월에 박근혜 대선 캠프에 영입돼 경제민주화 공약 설계를 맡아 새누리당을 좌클릭 시켰다. 이준석은 한때 박근혜 정부의 정도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이회창, 이한구 등으로부터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좌클릭,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당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2012년 9월부터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12월 사임한 후, 2014년 12월에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지냈다. 안철수 바른미래당 대표의 경제 멘토였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2016년 1월 자신은 그런 적이 없으며 언론에서 지어낸 얘기라고 확인했다. 2016년 1월 20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곧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추대돼 2월부터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9년간 패배만 거듭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고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2015년 11월 말 문안박 연대를 거부하고 혁신 전당대회를 역제안해 내홍에 빠졌다. 결국은 국민의당으로 안철수 이하 소속의원 21명이 나갔다. 문재인 대표는 "친노패권주의"란 명목으로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2016년 1월에는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되어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약 7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비대위, 선대위를 모두 거머쥐고 절대적인 공천권을 휘둘러 문제를 일으켰다.

정청래와 이해찬을 직권으로 공천 탈락시켰다. 친노의 손발을 자르고 자신은 비례 대표 2번에 공천하는 모습으로 큰 반발을 불렀다. 셀프 공천, 칸막이 공천으로 큰 욕을 먹었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국회 1당을 차지하고 수도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호남은 국민의당에게 의석 대부분을 내준다.

2016년 5월 24일에는 대우조선해양 노조위원장을 만나 “대형 국영기업이나 대우조선해양처럼 1만 명 이상 고용하는 업체는 노동자가 경영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종국에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총선 후 그는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제기하면서, 추호선생, 전권노인네 등의 별칭을 얻는 등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과 친문 성향 지지층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대표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실패한데다가 반기문 추대설, 안희정 충남지사 탈당 권유설 등이 퍼지면서 급속히 당내에서 힘을 잃는다.

2017년 3월 7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면서 국회의원직이 박탈됐다. 비례대표는 당에서 출당을 시켜주지 않으면 탈당하는 순간 직을 잃는다.

2016년 8월 27일 새로 선출된 추미애 당대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직에서 퇴임하였다. 

2017년 3월 27일 대선출마를 기정사실화 했다.

2017년 4월 5일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대선 목적은 내각제 개헌과 자신의 정치 활동의 최종 목표인 경제민주화임을 밝혔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12일. 국민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출마를 선언하게 되었다.

2017년 4월 30일 대선 레이스의 종반부에서 갑작스럽게 김종인은 내각구성권을 약속받고 안철수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다. 대선 후보중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후보를 모아 "반문재인 연대"를 구성하려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3명 다 서로와의 연대를 거부하였다.

2020년 3월,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민주당에게 과반의석을 달라고 말하는등 실수만 연발하였다.

김종인의 말대로 2020년 4.15 총선에서 더불어 민주당이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4.15 총선 패배 이후 미래통합당에 대해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일갈하며 당을 뜯어고쳐 당의 이름을 국민의힘으로 바꾸고 진보정당으로 탈바꿈 시켰다. 

민주당의 거듭된 악재에도 김종인에 의해 진보정당이 되어버린 국민의힘당은 전혀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국민의 힘당의 지지율은 전혀 오르지 못하고 있다. 중도를 끌어오기는 커녕 기존 지지자들의 이탈만을 불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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