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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일생

by @#$*&! 2020.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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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일생

 

삼성전자 회장 겸 삼성그룹 총수, 대한민국 최고부자로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의 셋째 아들로 첫째 형 이맹희 (CJ 그룹) 둘째 형 이창희(새한그룹) 를 제치고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되고 아버지 이병철이 사망한 1987년에 그룹 회장에 올라섰다. 1993 6 '신경영'을 주창하며 이후 자신의 모토로 삼아왔다.

- 경력

          2012. 6.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2011. 10.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고문

          2010. 3. ~ 삼성전자 회장

          2010. 2.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2005.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1998. 8.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1998. 4. ~ 2008. 4.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1996. 7. ~ 2008. 8.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1993. 3.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1989.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1987. 11. ~ 1998. 4. 삼성그룹 회장

          1987. 2.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1982. ~ 1993. 2.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1982. 3. ~ 1997. 3.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

          1981. 2.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1980. 중앙일보 이사

          1979. 2. ~ 1987. 11. 삼성그룹 부회장

          1979. 2. 삼성물산 부회장

          1966. 10. 동양방송 입사

2008년 김용철 전 법무팀장의 폭로로 드러난 비자금과 세금포탈 사건으로 인해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나 2010년에 삼성전자 회장직으로 복귀하였다. 2014 5월에는 급성 심근경색이 와서 이후로는 사실상 코마상태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수 없어 경영에서 물러난 상태로 직함만 유지 중이다. 현재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실상 삼성 총수 역할을 승계하였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어린시절 이건희

1. 이건희의 학창 시절

1942 1 9,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얼마 안 가 어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이병철의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의 할머니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고 이후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형과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 시기 이건희 남매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건희의 성격은 내성적이어서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서 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전란 중인 고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와 부산사범부속 국민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4, 5학년을 같이 다닌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 증언에 의하면 부자집 도련님이라 신기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와 같이 놀긴 했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안 치던 아이라 그 외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였다.

고교시절엔 서울사대부고에 진학했는데 당시 이건희 회장의 동창이었던 홍사덕 전 의원이 2001년 한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하는 길이다. 라며 195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사고를 가졌다고 기억한다.

고교시절 이건희는 말이 없고 행동도 느릿느릿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학과공부에도 별 뜻이 없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사냐고 물어보면나는 사람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는 황당한 답을 했다고 한다. 이후 삼성의 한 임원이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고교생이었던 이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병철이 두 말 하지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병철은 스스로의 인사관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고등학생 이건희의 사람 보는 눈을 더 인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어느날 이건희가 홍사덕에게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니 일본어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했다. 먹물 좀 들었다는 고교생들에겐 반일감정이 팽배해있던 시절이라 홍사덕이그걸 뭐하러 배우노?” 하고 뜨악하게 물었더니 심드렁한 표정으로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하였다.

사대부고 레슬링부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던지 성적은 중간도 못 했다고 한다이후 연세대학교 상학과(경영학과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진학해 졸업했다.

2. 이건희 회장의 군복무 및 기타 사생활

군복무를 했는지에 대해선 이야기가 엇갈린다. 일전에 강용석은 이건희가 정신질환으로 면제받았다는 주장을 했으나 그 근거로 든 게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고 한겨레 신문의 취재에서는 만기 전역은 아니지만 복무를 하긴 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삼성그룹 측의 공식적인 발표는 "이건희 회장님께서는 육군 현역병 출신으로 병장 만기전역을 하신 분이십니다."이다

이건희가 현역병 출신이 아니라 방위병 출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건희가 방위병 전역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보통 라이벌 대기업인 현대그룹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실 지금도 '삼성가 남자라면 인생 낭비가 되는 군 복무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드는 게 낫다'는 소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젊을 땐 술을 안 했다고 한다. 권근술 전 사장 말에 의하면 나이들어서는 하긴 하지만 잘 못 한다고 한다. 와인은 좋아한다는데 정작 와인 얘기를 하자 무관심했다는 소리도 있다.

자동차 매니아인 이회장은 유학생 시절 중고차를 사서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고 한다. 4200달러에 중고차를 사서 3~4달쯤 타고다니며 분해해본 뒤 수리해서 판매한 결과 700달러의 이윤을 남겼다. 유학시절 동안 중고차 6대를 수리해서 팔았다.

3. 삼성그룹 승계

1966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되었다.

1969년 말에 이건희 회장의 형들인 이맹희와 이창희가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하는 사건, 일명 왕자의 난을 터뜨리는 바람에 후계구도에서 쫓겨났다. 그 영향인지 장남이 아닌 셋째 아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을 물려받았다. 이건희 본인이 능력을 보여준 덕도 크다.

현대그룹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정주영 회장의 사망 직전(2000) 에 왕자의 난이 벌어져서 후계자들이 자신의 지분을 갈라 먹는 것에 성공하여 현대그룹이 분열되었던 반면 삼성그룹에서 왕자의 난은 이병철이 힘이 있었을 때 벌어졌고 그 결과로 이맹희와 이창희는 내쳐졌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이건희는 형이 두 명이나 있어서 삼성의 회장이 되리라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맹희의 무능과 이창희의 반란 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건희에게도 기회가 왔고 이건희는 두 형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인 이병철의 마음에 들 정도의 업무성과를 내면서 후계자로 굳어졌다.

특히 동양방송을 전두환에게 뺏기기 전까지는 드라마 부문을 직접 챙겨서 키웠을 정도로 의욕적이었고 성과도 꽤 좋았다.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의 반대에 개인 사재로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고 지속적인 설득으로 이병철 회장의 삼성 그룹 차원의 투자를 이끌어냈는데 이것이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가 되었다.

이건희는 두 명의 스승으로 선친 이병철과 장인 홍진기를 꼽는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 장인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과 무()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는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놀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주로 기술 관련 서적을 탐독하거나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관련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삼성 부회장 시절 사석에서주말에 우리집으로 초청해 한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 명이 넘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등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도 방한 시 이회장 자택을 주요 방문지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자택을 자주 찾는 한 재계 인사는이회장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미래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등 이공학 관련서적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데 전집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책들은 이회장이 직접 한 권 한 권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전한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콩알만한 부품의 기능 차이까지 꿴다고 한다. 국산 제품과 외국산 제품을 갖다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비교하며 품질 격차의 원인이 된 부품을 밝혀낸 뒤 계열사 기술담당 임원을 불러 그것을 쥐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4.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 이건희-

회장이 된 뒤 이듬해이자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이 되는 1988년에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하고 인간중심,기술중시,자율경영,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전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고문인 후쿠다에게서 받은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1993 6월 위로부터의 적극적인 혁신을 시작하여 그는 이러한 '신경영'을 통해 획기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해 나갔고 삼성전자를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켰다. 후쿠다 고문에게는 매우 두둑히 챙겨줬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들을 다 제치게 도와줬다면서 욕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

삼성그룹 회의에서는 심심하면 위기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매출이 100조를 넘어도 시장 흐름이 바뀔지 모르니 걱정하고 매출이 줄면 줄었다고 걱정하고 이렇게 항상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게 여러 CEO들의 특징이기도 하고 삼성 성장의 비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텔의 前 CEO도 일본 업체에게 메모리반도체 분야를 추월당한 다음엔 맨날 위기론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항상 그러는 건 아니라 2010년대 초반쯤엔 중국이 우릴 쫓아오려면 아직 멀었고 일본은 힘이 빠졌다는 뉘앙스로 낙관론을 내놓기도 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답게 경영 방식 또한 철두철미하고 세세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건희와 관련된 수많은 저서 중에는 제3자인 작가가 쓴 평전인 "이건희 스토리" 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이미지와 다른 그의 삶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선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이긴 하지만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다만 2010년대 이후부턴 기업규모가 커져 노조가 사실상 허용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삼성에서 설립된 노조가 아니라 삼성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합병당하는 회사에 있던 노조가 존속한 것이다.

5. 입원

2014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심장이 멎는 급박한 사태에 이르기도 했으나 심폐소생술로 심장기능이 돌아온 후 삼성그룹 산하인 삼성서울병원에 이송됐다. 스텐트 시술을 받고나서 VIP병실에 입원했다. 그리고 몇 년째 계속 입원해있다. 주기적으로 그의 사망설이 돌고 있다.

반 식물인간 상태에서 눈을 뜨고 감는 등의 반사적인 행동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재활치료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구단에서 뛰고 있는 야구선수 이승엽의 홈런 소식에 눈을 번쩍 뜨기도 했다고 한다.

이 회장이 입원한 이후부터 삼성 경영권은 이미 이재용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다. 2015 5월에는 삼성문화재단,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직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2016 6 30일경 이건희 회장이 사망했고 오후 3시에 발표한다는 루머가 돌아 삼성주가가 폭등하는 해프닝이 벌이지기도 했으나 삼성은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했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에는 관세음보살상 중앙에 이건희 앞으로 건강 발원을 빌며 가장 큰 초가 하나 공양이 되어 있는데 아마도 아들 이재용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2017 8 1, 한겨레는 "그룹 사정을 잘 아는 핵심 관계자" 가 이건희 회장의 건강 상태가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양호하다. 건강한 상태다라고 밝혔고 침대에만 누워 있지 않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병실 복도를 오가기도 한다"는 말을 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2017 11 6, 2년만에 TV조선 종합뉴스 9에서 이건희 회장의 근황을 취재한 영상이 보도되었다. 이건희 회장이 영화를 보면서 간호사와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이건희가 보고 있던 영화가 목소리의 형태였다고 한다.

6. 성매매 의혹

2016 7 21일 오후 10시 인터넷 언론인 뉴스타파에 의해 이건희 회장의 불법 성매매 장면이 보도되었다.

영상이 촬영된 기간은 2014년 이건희 회장의 장기 입원이 시작되기 전인 2011~2013년이다. 때문에 영상 속에는 건강했을 당시의 이건희 회장 모습과 목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수차례의 전문가 검증을 통해 위변조 가능성이 낮음을 확인했다.

영상에는 이건희 회장이 여러 여성에게 돈봉투를 건네주던 중 한 여성에게 "니가 오늘 수고했어. ? 니 키스 때문에 오늘 OO했어."와 같은 음담패설을 내뱉는 등 누가 봐도 성매매로 의심할 만한 발언과 행동이 적나라하게 찍혔다.

뉴스타파 제작진은 취재 결과 이 영상이 삼성그룹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일당이 성매매 여성과 공모한 끝에 나온 것으로 보이며 성매매에 대한 삼성그룹의 조직적 지원이 있었을 가능성도 보도했다.

 보도 직후 이 영상이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고, 기사화까지 이루어지면서 포털 사이트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다수의 네티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이건희 회장이 올라간 걸 보고 지난 몇 년간 투병 중이던 이 회장이 결국 사망한 줄 알고 기사를 찾아봤다가 전혀 예상 못 한 소식에 놀랐다고 한다.

2016 7 22, 삼성그룹이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물의가 빚어져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회장의 사생활 관련이라 회사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검찰 조사 결과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촬영을 지시한 사람은 CJ그룹의 차장급 직원인 S씨로 파악됐다. 구속 후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성폭력처벌법에 따라 "카메라 등 기계를 이용해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몰래 찍고 이를 타인에게 제공하는 것"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수사팀은 S씨를 상대로 이 회장 동영상을 갖고 삼성그룹을 협박해 금품을 요구한 적이 있는지 조사 중이라고 전해졌다

7. 기타 여담

부산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사립학교를 나왔을 것으로 보는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초중고는 모두 국립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레슬링부에 들어있었다. 럭비도 좋아했고 승마도 즐겨했다. 이를 바탕으로 레슬링협회와 승마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2008년 특검 수사 때는 수사관들에게 승마의 장점에 대해 줄줄이 설명하면서 아예 직접 배워보라고까지 권했었다고한다.

KBO 리그 창립 초창기에는 삼성 라이온즈 초대 구단주로서 야구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구단 경영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 때 롯데 자이언츠에 패한 뒤로는 직관은 안 간다고 한다.

개와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여 한남동 자택에서 개를 직접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삼성화재에서는 안내견 관련 사업을 지금까지도 계속 하고 있다애견 사랑으로 유명하다. 한남동 자택에 한 때 수십 마리의 개를 키우기도 했다. 진돗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별히 아주 비싼 개를 키운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말없이 조용히 따르는 개를 특히 좋아하고 아꼈다고 한다. 특히 "벤지"라는 이름의 포메라니안을 무척 아껴서 이 개가 16세의 나이로 노령으로 사망하자 충남대에 연구비를 지원하여 이 개를 체세포 복제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산 유년 시절에는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가정교사의 특별교육만 받아 평범한 친구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건희는 거의 하루종일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고 한다. 이것은 이건희 회장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같은 영화를 수차례 관람하면서 각각 주연, 조연,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보는 버릇을 갖게 되었고 이는 회장이 된 후 다각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자동차 매니아다. 자동차 수집과 운전도 좋아했다. 가끔은 에버랜드 서킷을 전세 내고 레이서에게 교습 받아가며 드라이빙을 배웠다고 한다. 1982년에는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크게 나서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아야 했을 정도다. 부가티 타입을 비롯한 클래식 카들은 물론 고급 세단을 수집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슈퍼카 매니아로 알려져 있는데 2015년 조사 결과 26억원짜리 부가티 베이론 포함 총 12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고, 차량 가격을 다 합치면 총 477억 원에 달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에 단 한대 있는 부가티 EB110도 소유 중이었는데, 삼풍백화점 붕괴 시기에 삼풍백화점에 있었는지라 현재 소유는 불명확하다.

에피소드로 외제차를 구매하다 영업사원에게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포르쉐를 구입하려 매장을 방문한 이건희가 포르쉐를 총 6대 고르고 계약사인을 하고 가는 이건희를 포르쉐 신입직원이 몰라보고 계약금을 달라며 발목을 붙잡은 일이 있었다. 이에 이건희는 지갑가져와라 하면서 3억을 즉납했다는 일화도 있다.

벤틀리 매장에서는 벤틀리를 고르는데 역시나 이건희를 몰라본 직원이 차를 리스로 하면 좋다는 조언을 해주고 직원은 신원조회를 위해 이건희의 정보를 삼성 캐피탈에 의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던 습관이 있었는지 경영권을 이어받은 후에는 회사일 외에 대중매체나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는 편이었다. 주로 한남동 자택에서 집무를 보며 은둔과 칩거 등을 반복하였다. 미국, 중국, 유럽 등으로 국외 출장도 잦았으며 암 투병 경험에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데다 폐까지 좋지 않아 요양 겸 하와이, 타이완 같은 곳으로도 오래 나갔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는 선대째부터 내려져 오는 인연으로 10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경영 멘토로서 매우 절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김승연 회장이 중대한 경영상 결정 사항이 있으면 이 회장에게 찾아와 조언을 구하고, 반대로 당시 경영 일선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이었던 이재용 부회장을 김승연 회장에게 보내 경영 수업을 받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 본인이 별장으로 놀러 갔을때 한화 이글스 구단이 전지훈련을 오자 선물을 보내기도 했으며 승지원으로 김승연 회장을 불러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덕분에 자식들도 나이차가 있음에도 절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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