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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일생

by @#$*&! 202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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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일생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

 

삼성 설립자 겸 초대, 제3대 회장이다.

전자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주역이다.

이병철 사후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부흥시켰다.

지금의 삼성, 신세계그룹, CJ그룹, 한솔그룹, 중앙일보가 모두 이병철로부터 비롯되어 소위 '범 삼성가'라 불리며 현재도 재계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 이병철의 일생

경주 이씨 판전공파의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할아버지 때 만석꾼의 집안이 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병철의 16대조 할아버지 이계번이 경남 의령에 정착을 했고 조상들 중에는 승정원 좌승지나 통정대부를 지내기도 하는등 영남 유림의 명문중의 하나였다. 아버지 이찬우는 천석지기 농토를 소유한 지주로 부자였다.

이병철 선대회장(우측)의 학창시절 모습

서울 종로의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합격하지만 건강 때문에 중퇴하고 귀국한다.

일본 유학시절 배멀미가 너무 심해 2등선실에서 1등 선실로 옮기려고 했는데 일본인 순사가 가로막은 사건을 계기로 식민지인의 설움을 절감하게 되고 반일 의식을 가지게 됐다고 알려져 있다.

고향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 다시 상경해 2년간 그저 부친의 송금을 받으며 지냈다. 하릴없이 낙향해서도 집안일은 부친과 형이 했고 본인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직접 일본에서 상업 작물 종자를 들여오고 개량돈()과 씨앗닭도 들여왔으나 취미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웃 친구들과 골패(도박의 일종)에 빠졌다. 한밤중까지 도박이 계속되어 늘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빈번했다.

골패 : 구멍의 숫자와 모양에 따라 패를 맞추는 전통적인 놀이 및 도박 도구. 강패(江牌)·아패(牙牌)·호패(號牌)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미 네 아이의 아버지로서 26세의 그에게 전환기가 찾아온다. 방문을 열고 달빛에 비친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을 받았다고 한다. 허송세월을 자책하고 밤새 독립운동을 할까 일본 공무원이 될까 사업을 할까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봤다고 한다. 결국 사업으로 정한다. 먼 훗날 인터뷰에서 이 때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삼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칩시다.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습니다."

- 이병철 삼성그룹 초대 회장 -

이후 부친에게 지원받은 쌀 300석분의 토지를 기반으로 사업을 일으켜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창업을 시작으로 운수업에도 진출하였으며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 조홍제, 허정구 등과 함께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1942년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하였다. 초기에는 부동산 투자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터지며 사업이 몰락하고 부동산 투자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부동산 외의 사업은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었고, 경제적 흐름을 통해 일제의 패망을 짐작하는 대국적 안목과 수완으로 재기하기에 이른다.

해방 이후 6.25 사변이 벌어지자 초기엔 정부 발표만 믿고 전쟁이 금방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서울에 있었으나 난데없이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90일간 북한군을 피해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때 전시 체제로 점령 지역 시민들의 살림살이를 징발하는 북한을 보며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삼성물산처럼 물자를 쌓아둔 창고가 있는 경우는 아무래도 더 손해를 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운전기사 위대식의 헌신으로 서울을 간신히 탈출하였으며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의 종잣돈으로 1951년 부산광역시에서 삼성물산을 설립, 전쟁으로 사방에 널리게 된 고철을 수집한다.

그리고 이 고철을 2차 대전의 물자징발(物資徵發) 여파로 쇠가 부족했던 일본에 팔고 다시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홍콩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공급, 사업 6개월 만에 삼성물산은 10억 원이 넘는 이익을 올렸으며 1년 뒤에는 무려 60억 원의 재산을 쌓으면서 단숨에 재기에 성공한다. 고철 수집 사업을 시작할 무렵, 전쟁 전에 홍콩에 수출한 면실박(棉實粕, 목화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깻묵) 대금 3만 달러가 도착해 다시 든든한 자본금을 갖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호재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던 구리 탄피들을 긁어모아 이를 재수출하는 사업까지 하면서 돈을 갈쿠리로 쓸어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삼성물산에서 모은 자금으로 1953년에는 제일제당(CJ그룹의 전신),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그룹 규모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손님에게 설탕을 탄 물을 대접할만큼 시장에서 고급 기호품으로 귀하신 몸 대접을 받는 설탕 값을 낮추는 데 기여했으며 양복 사업은 품질관리 부족과 이미 시장을 선점한 외국제품의 영향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1957년 정부의 모직물 수입 금지조치 수혜 등을 입으며 국내 시장에서 성장하게 된다.

1940 ~ 50년대에 갖은 시행착오를 거쳐오다 50년대 후반부터 뒤늦게 성장가도에 오른 정주영 회장과 달리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이승만 정권 시기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선친(先親)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는데 이 회장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또 당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한 해 비료 양은 40만 톤이었지만 충주와 나주에서 생산되는 비료는 6만 톤에 불과해 당시 정부로부터 달러 지원을 약속받으며 비료 공장 설립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그러나 1960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며 비료공장 설립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로 검찰에 연행되어 벌금 50억을 내며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1 5.16 쿠데타가 일어난다. 당시 쿠데타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한 보여주기식으로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는데 재계 1위 기업인인 이병철은 당연히 부정축재자 1호로 불렸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병철 등을 부패 혐의로 몰았으나 결국 경제 운용과 성장을 위해 이들과 타협하였고 이 회장도 군사정권과 협력 관계를 갖게 된다. 비료공장 설립도 재개한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10년의 곡절 끝에 울산에 백만평 부지를 매입해 비료 공장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인 연 36만 톤 생산이 가능한 사업장으로 완공된 즈음 삼성에 또 한번의 시련이 닥쳤다.

삼성을 통해 장기표, 김성곤과 같은 공화당 자금책들이 밀수를 해서 번 돈으로 정치자금과 사업자금을 해결하도록 했는데 이때 김형욱의 중정이 세관 통과를 맡고 삼성이 밀수 및 배급을 맡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 경향신문에 밀고를 하면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다. 이때 이병철은 반강제적으로 한국비료공장과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을 정부에 넘기고 경영일선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중앙일보를 이용해 공화당 5명에 대해 표적 낙선을 명한것으로 알려졌고 그 결과 4명이 낙선하게 된다. 한국비료 사건으로 이병철과 박정희는 얼음과 같은 관계가 되었고 이병철은 정치권과 "불가근 불가원" 하라는 말을 남긴다.

박정희는 이병철을 사치스럽게 자라 소비재나 하는 사람으로 치부했고 이병철은 박정희를 "만주사관학교를 나온 천박한 군인으로 좌익했던 동지들을 배신한 신의 없는 사람"으로 싫어한것으로 알려져있다.

한동안 삼성그룹 경영은 장남 이맹희가 이끌게 되지만 이맹희의 2년간의 경영이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이병철은 1968년에 다시 복귀한다.

차남 이창희는 박정희에게 부정한 일을 저지른 이병철을 삼성 회장 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투서를 썼는데 투서에는 이병철이 해외로 달러를 밀반출한 내용과 제일모직, 제일제당의 탈세 내역을 담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이병철은 이창희와 연을 끊어버리게 되는데 이 사건에 이맹희도 연루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이병철은 장남인 이맹희도 내쫓아버렸다.

2012년 이건희는 이맹희를 두고 '아버지를 고발한자이고 아무도 장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했다.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막내아들(삼남)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차기 수장으로 지명된다.

정권에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사를 받고 대중에 일방적으로 비난받는 일을 겪은 후 정계에 진출하려는 뜻을 품고 몇몇 명망 있는 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고 한다.

대신 그에 대한 대안 확보의 차원에서 언론사를 설립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TBC 동양방송(1964)과 중앙일보(1965). 중앙일보는 현재까지 남아있지만 TBC 1980년 전두환이 등장하면서 KBS로 통폐합돼 KBS 2TV, KBS 2FM 등으로 전환된다

일찍이 한일은행·상업은행·조흥은행 등과 안국화재·동방생명 등을 인수하였고, 1961년 초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대한암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하였다. 삼성장학회를 설립하고 대구대학 및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삼성전자·삼성전기 등을 통해 첨단 전자통신 및 반도체 기술 발전에 영향을 끼쳤으며 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삼성그룹을 성장시켰다.

2. 반도체 산업 진출

1982년 암 수술의 고비를 넘기고 만 72세 노구의 몸으로 이병철은 2년 전, 일본 후지(富土) 화학 회장인 이나바 슈조(稻葉秀三) 박사와의 대담 중 나온 반도체에 관한 발언을 염두에 두고 미국의 반도체 산업 시찰(視察)에 나선다.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젊은이들을 보며 반도체 사업 투자를 결심한다. 사실 삼성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라 1974년 이병철의 3남 이건희가 반도체 산업 진출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경영 위기를 맞자, 이병철이 삼성전자로 하여금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회생시키는 과정에서 반도체 사업을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일본, 한국의 반도체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며 정보를 입수해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예측해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 일본 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에서, 세계 1등 수준이 되어야 승부를 걸 수 있는 사업에 뛰어든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도박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의 진입 장벽은 높았다. 1984 10, 미국 마이크론사가 삼성 반도체에서 겨우 수출하기 시작한 64K D램 가격을 기존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기업들이 덤핑 공세에 나서며 가격이 30센트로 폭락하였다. 이에 삼성이 20센트 가격으로 대응하면서 84년 한 해에만 1,300억 원의 적자를 보게 되었다. 직원들이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하였으나 이병철은 "내 눈엔 돈이 보여."라 말하며 꿋꿋이 밀어붙였다.

1984 10, 악몽의 덤핑 공세가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업계에서 기적이라 부른 256K D램 세계 최초 개발에 성공하고 86년에는 1Mb D램을 출시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비록 개발 전후에 적자를 보더라도, 확고한 기술력과 관리능력이 갖춰진 이상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256K D램 제품은 시장 출시 1년 만에 세계 D램 시장의 1/10을 점유, 64K D램으로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삼성전자는 시장에서 반석(盤石)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이후 이건희 대에 이르러선 미국, 일본의 선두주자들을 차례로 추월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생전에 흡연을 즐겼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해 10년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1987 11 19일 저녁 5 5,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였다. 하지만, 암 발견 초기부터 관련 질병 자료를 다방면으로 수집해 치료에 활용하며 관리한 덕분인지 투병 중에도 반도체 산업 진출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폐암은 유전될 수 있는데 큰 아들인 이맹희 전 회장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삼남인 이건희 회장도 폐질환이 발병해 불편을 겪었다. 또 이병철의 대를 잇는 범삼성가에는 일반인보다 약한 폐와 샤르코-마리-투스 병이 유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건희는 삼성병원에 입원 전까지 겨울에는 주로 하와이 별장으로 떠나있었으며 이재용 부회장 집의 공기 상태는 하와이 별장에 준할 만큼 맑게 해놓는다는 소문도 있다.

사후 이태원동 자택에 빈소가 차려져 노태우 민정당 총재와 이재형 국회의장,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이 조문했으며,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11 23일 호암아트홀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뒤 유해는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부지에 안장되었다. 다만 본인 의지와 달리 묘 위치가 삼성물산 구역으로되어있다 보니 후손들의 배임 논란이 있다.

3. 이병철의 사업철학

호암자전에서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며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의 설립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자신이 세운 원리원칙은 무조건 지키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정해진 스케줄을 무조건 지켜서 이 회장이 출근해 결재를 하다 펜을 딱 놓는 시간은 오후 1230분 점심식사 시간이었다고 한다.

삼성의 무노조 원칙을 만들었다. 노조에는 강경하였지만 사원들의 복지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제일모직 공장을 지을 때는 사원들의 기숙사를 짓는 데도 공을 들였으며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 사원들이 오갈 데가 없어지자 원하는 계열사로 이직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사업보국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이러한 경영이념을 집대성한 호암자전에서는 '무한탐구' '무한정진'의 태도를 기업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언급했다.

"조직이 사람을 움직이는 기업은 망하지만, 사람이 조직을 움직이는 기업은 발전한다."

"내 경험으로 보면 입사 1, 2년이 지나면 신입사원의 5%는 탈락하고 30%는 우수한 인재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65%의 사람이다. 반 수 이상을 점하는 이들은 환경과 지도 여하에 의해 좌우된다. 조직력이란 바로 이들을 인재로 만들어나가는 힘이다."

"국가의 발전이 유능한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면 기업의 발전은 유능한 경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은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말하는 걸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는 60년이 걸렸습니다."

생전의 이병철은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고 말할 정도로 인재 선발과 관리를 매우 중시했으며, 평소 이렇게 눈여겨 봐뒀다가 일을 맡긴 사람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6.25 전쟁으로 생명의 위기를 겪었지 충직한 운전사 위대식의 도움으로 암달러 시장에서 달러를 구해 가족들과 서울 삼성물산공사의 임직원들이 무사히 피난할 수 있었고 서울의 사업 기반이 한 순간에 북한군에게 몰수되어 빈털털이가 되었지만 대구의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를 건실하게 경영했던 이창업이 건넨 3억 원으로 재기할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65년에는 5.16 직후 처형당할 뻔했던 홍진기 전 법무부 장관을 포섭해 중앙일보를 창간, 일찌감치 자사(自社)에 우호적(友好的)인 언론을 만드는 안목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록 고용된 사장이지만, 전직 국무위원이자 수재로 유명했던 홍진기를 대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으며, 나중에는 사돈 관계까지 맺게 된다.

1956년 삼성물산이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한 이래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원 선발 최종면접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병철 창업주의 인사방침은 지역주의, 온정주의(溫情主義)가 배제된 철저한 능력주의였으며 경영실적이 나쁜 사장은 가차없이 인사 조치되었다. 생전에 실제로 발언한 인재관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그릇의 크기만큼 일한다. 사장은 사장의 그릇이 있으며 상무는 상무의 그릇이 있다. 사장의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을 사장에 앉혔을 경우에는 그 사람도 죽고 그 직책도 죽는다.

어느 기업이든 최고경영자를 잘 두어야 기업이 잘 굴러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입사원을 뽑은 후에는 가급적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경영자의 요건을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에 무척 신경썼다고 한다.

그 요건이란

1.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여야 한다.

2. 탁월한 지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3. 신망(信望)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4. 창조성이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

5. 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6.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7.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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