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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성 2대 회장 이맹희의 일생

by @#$*&! 2020.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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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2대 회장 이맹희의 일생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장남으로 삼성그룹 제2대 회장이다. CJ그룹 명예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큰형이며,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이미경, 이재환, 이재휘의 아버지이다.

삼성가 가계도

1. 이맹희의 일생

6.25전쟁 발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농업대학을 졸업하였는데, 입영을 기피한 것으로 비난을 받는다.

1960년대부터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백화점, 동방생명, 안국화재, 제일모직, 성균관대학교, 삼성문화재단 등에서 부사장, 전무, 상무 등 17개 주요 계열사 임원직을 도맡아 명실상부한 삼성그룹의 후계자였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회장직에서 사퇴한 아버지 이병철을 대신해 삼성그룹의 제2대 회장을 했으나 저돌적이며 불같이 급한 성격 덕분에 창업공신들과의 관계에서 마찰이 심해 뒷말이 많았다. 이맹희가 회장을 맡고 난 후부터 경영실적이 좋지 않아 그룹 전체가 휘청이는 지경까지 가게 되는 바람에 결국 2년 뒤인 1968년 이병철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그룹 후계구도에서의 위상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9년 동생 이창희가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면서 한때 17개 계열사 임원직을 맡았던 그가 1973년 부사장 자리 3개만 남겨놓게 되며 사실상 후계구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삼성 왕자의난은 1969년 말에 일어난 삼성가의 흑역사이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회장직에 물러나 있던 이병철이 1968년부터 경영 일선에 복귀하자 차남이었던 이창희가 정부와 갈등을 빚는 아버지의 복귀가 그룹의 미래에 이롭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자신의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해외로 100만 달러를 밀반출하고 현충사를 지을 때 경비를 부풀리고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이 탈세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부정한 일을 저질렀으니 삼성그룹을 이병철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탄원서를 확인한 박정희 대통령은 위법사항을 떠나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 자체가 천륜을 어기는 것이라 판단하여 탄원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정희로부터 탄원 사실을 전해들은 이병철은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이창희를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축출시켰다.

문제는 당시 이맹희가 동생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에 협조 혹은 공모를 했다는 의혹이 있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해당 탄원서를 이맹희와 가까운 청와대 사람들이 중간에 만지게 된 것이 밝혀지면서 이맹희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실권을 쥐기 위해 고향친구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매개체로 공작을 꾸몄다는 의혹이 있었다.

하지만 이맹희가 쓴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에 따르면 이런 의혹에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회고록에따르면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동생인 이창희가 아버지를 내치려는 음모 시도를 눈치채어 화가 난 나머지 이창희의 벤츠 자가용을 때려 부수며 크게 혼낸 적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무렵 자신은 해외기업들과의 기술제휴 협상차 해외출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보니 경영일선에서 복귀를 시도하던 아버지를 방해하는 듯한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에 아버지가 그런 의심을 할 수도 있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청와대 사람들과의 관계와 왕자의 난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사카린 사건 이후 청와대 쪽과의 관계가 나아지는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으나 애초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회고록을 작성하는 시점에서 관련 주변인들도 생존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거짓말로 회고록을 쓸 수 있겠냐며, 본인은 맹세코 왕자의 난에 대해 완전 결백함을 맹세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맹희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건희 회장은 2012년 이맹희 회장과의 재산 소송 당시 이맹희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30년전에 자신을 군대에 고소하고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하고 청와대 그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했다가 가문에서 이미 퇴출당한 양반이라며 자기 입으로는 장손이다 장남이다 그러지만 이미 아버지께서 "맹희는 완전히 내 자식 아니다"라고 못 박았으며 지금도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창희의 왕자의 난과 관련하여 중론은 이맹희가 적어도 방관 혹은 다소 소극적으로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결국 전후사정을 감안하여 이병철은 왕자의 난 사건으로 인해 장남인 이맹희까지 한 통속으로 의심한 듯하며 충격이 컸던 이병철로서는 이맹희의 적극적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종합해 보자면 자식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병철이 경영권과 관련하여 한층 예민해지기 시작한데다 결정적으로 자존심이 센 이맹희가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듯한 처신이 문제가 되면서 부자지간의 정에 금이 심하게 가는 바람에 이맹희가 그룹의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 후계자로 내정된 삼남 이건희의 경영권 승계에 있어서 장남인 이맹희가 방해가 될까 싶어 정신병원에 감금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삼성의 이런 움직임을 우연히 알게 된 친구 검사가 귀띔을 해준 덕에 지방 별장에 기거하면서 사냥용 총을 가지고 있다가 자신을 잡으러 온 삼성의 인력들에게 총을 겨누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꽤 비중있게 그리기도 했다.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 크게 낙담한 이맹희는 일본으로 잠시 떠나있다가 1975년 귀국한 후 겨울에는 사냥하러 다니고 여름에는 워커힐에서 말을 타는 야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1987년 이병철이 사망하고 후계자로 내정된 셋째동생인 이건희가 삼성그룹 회장이 되면서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직책에서도 완전히 물러난 뒤 삼성그룹과는 상관없이 본인이 별도로 설립한 기업인 제일비료의 대표가 되기도 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사업을 접었다.

이병철의 유언에 따라 장손이자 이맹희의 맏아들인 이재현의 몫으로 내정되었던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한 뒤 오늘날의 CJ그룹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분리 당시 이재현의 나이가 34세에 불과했으나, 이맹희는 경영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출되어 경영 일선에 나서지 않은 채 야인 생활을 계속하였고 이맹희의 처남이자 이재현의 외삼촌인 손경식이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공동회장을 맡았다.

이후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를 집필한 것 외에는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5 8 14일 폐암으로 중국에서 타계했다사후에 CJ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미디어에서는 주로 삼성가의 잊혀진 비운의 황태자 정도로 가끔씩 거론되는 정도다.

 

2. 이건희 회장과의 소송전

삼성전자 회장이자 셋째 동생인 이건희와 이병철의 재산상속 문제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이맹희와 이건희의 관계는 좋지 않다. 이런 갈등은 결국 삼성그룹과 CJ그룹의 갈등으로 번져갔으며 한때 삼성전자 전무였던 사람의 CJ그룹 이재현 회장 미행설이 나돌면서 삼성과 갈등을 빚었고 2012년 이병철 추모식 때는 삼성이 CJ 관계자들의 방문을 불허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형제간의 갈등과 기업간의 갈등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이건희의 정권 무시적 발언에 분노한 정권이 이건희를 차마 어쩌지는 못하고 친밀했던 CJ에 소송을 권유하여 일을 벌였다는 후일담을 보도하기도 했다.

싸움은 이건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3. 이건희 회장 성매매 고발사건

CJ 그룹과 삼성이 소송전을 벌일 당시 이건희 동영상을 촬영한쪽에서 CJ측에 거래를 제안한것으로 알려졌으나 거절 당한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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