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나의 일생, 어린시절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경영인.
이탈리아 SSC 나폴리의 스쿠데토 2회와 UEFA컵 우승을 이끌며 구단의 전설이 되어 영구결번을 부여받았고, 조국인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1986년 월드컵 우승과 1990년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었다. 아르헨티나에는 그를 숭배하는 '마라도나교'라는 종교가 실제로 존재한다.
1. 유년기
유년 시절의 마라도나
마라도나는 1960년 10월 30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라노스에서 3남4녀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코리엔테스 주에서 이주해 온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부 외곽의 판자촌인 빌라 피오리토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 돈 디에고는 가족을 위해 새벽 4시에 막노동을 하러 나간 뒤 밤늦게 돌아와 곯아 떨어지기 일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을 제외하면 집안의 장남인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무엇이라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하는 전쟁놀이엔 도통 관심이 없었던 그는 다행히 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견한다. 바로 축구였다. 축구공을 튕기며 재주를 부리는 트래핑을 좋아했던 마라도나는 8살 때 지역 클럽 에스트렐라 로자에서 뛰던 중 온종일 공만 갖고 논다는 빈민가 소년의 소문은 금세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그의 재능을 알아본 스카우트에게 목격되었고 전부터 그를 주시하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11살에 불과했던 마라도나에게 과감한 투자를 하기로 결심하며 계약하게 된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유소년팀인 로스 세볼리타스에서 뛰게 된 마라도나는 그곳에서 에이스가 되며 팀의 주축이 되었고 1부 리그 경기에서 볼보이로 나와 하프타임 중간 휴식시간에 공으로 마법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중들을 즐겁게 했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이런 마라도나에게 아파트를 선물한다. 판잣집에서 연명하던 소년과 소년의 가족들은 꿈처럼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물을 흘렸고 그 광경을 본 마라도나는 축구로 꼭 성공해 가족들과 평생 부유하게 살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마라도나라는 이름을 아르헨티나 전역에 알리는 발판이 된다.
2. 선수 시절 및 플레이 스타일
축구 선수로서의 모든 것에 능통했던 만능 플레이메이커이자 초절정 드리블러. 현역 시절 마라도나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근육질이며, 몸도 상당히 단단하다. 그러다 보니 상대 선수가 마라도나를 막기 위해 무작정 몸으로 부딪히다가는 오히려 역으로 튕겨나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마라도나의 드리블이 투박하다는 것은 아니다. 마라도나의 드리블이 상대 수비수 입장에서 버거운 점은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바탕으로 기술적 측면에서의 드리블링 자체도 뛰어나다보니 몸싸움으로도 잡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볼터치의 가속과 감속이 워낙 변화무쌍하면서도 속도까지 빠르다 보니 도저히 그 수비할 타이밍을 잡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비수들이 집요하게 마라도나의 유니폼이나 팔을 잡아채고 심지어 백태클을 숱하게 날리는데도 마라도나는 그 태클 타이밍을 다 농락하면서 전진하는 압도적인 개인능력을 과시했다.
이렇듯 마라도나는 축구 사상 최고의 드리블러로 평가받지만, 정작 마라도나의 진정한 가치인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자질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마라도나는 경기장 전체를 조망하고 경기장 곳곳의 공간에 계속 관여하면서 경기 페이스까지 조절하고 변속하는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자질 또한 그야말로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마라도나는 시야와 공간 판단력이 엄청난데다 패스의 구질과 타이밍 또한 창의적이고 변칙적이면서도 그 정확도까지 뛰어나다. 그렇기에 드리블을 막으려고 집중마크가 들어오는 순간 곧바로 빈 공간으로 위협적인 패스를 찔러주는 능력까지 겸비했으며, 반대로 수비가 마라도나의 공간을 미리 차단해버리면 압도적인 볼키핑으로 집중마크를 자신에게 유도하면서 상대 수비를 분산시키면서 자유자재로 템포와 공간을 주도하는 특출난 플레이메이커였다.
즉 마라도나의 진가는 압도적인 드리블 전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듯 경기 흐름 전체를 읽고 거기에 최선의 플레이로 대응하며 경기를 지배하는 데에 있다. 드리블이든 패스든 정지상태에서의 수비 끌어당기는 공간창출이든, 마라도나는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을 읽고 거기에 최적의 판단으로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경기 판세 자체를 바꿔버리는 모습을 위기의 순간이나 승부처에서 매우 빈번하게 보여줬으며, 이것이야말로 상대팀에게 마라도나가 왜 그렇게 무서운 존재인지 입증한다.
이로 인해 나타난 마라도나 상대법 중 하나는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마라도나의 발목을 일부러 노리는 악질적인 견제전술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렇듯 마라도나는 폭넓은 시야와 창의성, 테크닉을 기반으로 패싱과 연계를 하면서 두 세명 이상의 밀집된 수비도 손쉽게 붕괴시켜 버린다. 그래서 "압박축구는 마라도나를 견제하기 위해서 만든 전술이다."라는 속설도 있을 정도다.
여기다가 마라도나는 위협적인 왼발 프리킥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다. 그래서 드리블하다가 연계나 공간과 페이스 조절로 팀의 공격 활로를 찾고 템포를 주도하다가도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는 일부러 파울을 유도하기도 하면서 얻어낸 프리킥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매우 위협적으로 꽂아넣기도 했던 것이다.
상술했듯이 마라도나는 드리블과 슛팅능력 외에도 경기 페이스의 변화에 맞춰서 템포 전환과 주도를 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플레이를 조절하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굳이 본인이 드리블로 몹몰이를 하는 것 이외에도 정지 상태에서도 왼발만으로도 위협적인 플레이가 수시로 터져나온다. 그리고 운동량과 운동반경에서도 하프라인 아래부터 2선, 1.5선, 1선까지 너른 움직임을 왕성하게 가져가면서도 플레이의 패턴까지 정형적이지도 않아서 대인방어는 물론이고 지역방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마라도나는 주된 포지션이 공격형 미드필더였음에도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을 정도로[9] 문전 침투와 슛도 최고 수준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아예 1선 포워드로도 플레이를 한 기간이 있을 정도. 단신인데도 헤딩능력도 준수했으며, 프리킥 능력도 최고였다.
단점을 꼽자면, 오른발의 사용 빈도와 정확도 모두 왼발에 턱없이 못 미쳤다는 점이다. 때문에 양발잡이만큼 변칙적인 슈팅 타이밍과 슛팅각도를 잡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전문 골잡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왼발 편향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의 드리블 실력과 준수한 득점력을 자랑했다는 사실이 마라도나의 왼발 테크닉이 얼마나 사기적이었는지를 반증한다.
게다가 할리우드 액션으로 비판받기도 하였는데, 마라도나는 매번 시합에서 기본으로 2명, 3명, 많게는 5명 이상이 따라붙으면서 온갖 거친 플레이를 받으면서 발로 걷어차고, 유니폼을 잡아당기고, 공이 아닌 발목을 향한 살인태클의 위협에 시달렸으니 인격자가 아닌 이상 누구든지 화가 머리 끝까지 날 만도 했다. 이런 상황이니, 필연적으로 "매춘부"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할리우드 액션의 달인이 되었을 수 밖에 없었다.
마라도나가 뛰었던 1980년대는 10번 공격형 미드필더, 플레이메이커들이 많았던 공격형 미드필더들의 전성기였다. 당시에 미카엘 라우드루프, 카를로스 발데라마, 게오르게 하지, 한지 뮐러,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소크라치스, 베른트 슈스터 뿐만 아니라 지쿠, 미셸 플라티니 , 엔조 프란체스콜리, 루드 굴리트 등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80년대를 풍미했다. 마라도나가 대단한 이유는 그 수많은 기라성 같은 플레이메이커들, 10번 유형의 선수들과 비교해서 의심의 여지 없는 1인자였던 것에 있다. 특히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11명이 하는 팀 스포츠지만 우리는 지금 축구의 개념을 벗어난 최초의 선수를 보고 있다"라는 평가를 들으며 그 정점을 찍었다. 아르헨티나를 FIFA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1986년의 마라도나는 '축구 국가대항전 단일 대회 퍼포먼스 면'에서 역대 최고로 거론된다.
또한 지금은 당연시 여기는 지역방어와 압박은 마라도나가 뛰었던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가 당대의 수비 시스템을 붕괴시킴으로 당시 그를 막아야 했던 AC 밀란의 감독 아리고 사키가 개인이 아닌 구조의 정형화를 통한 강력한 압박 수비 전술인 사키이즘을 고안하며 현대 축구의 근간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사키는 "압박축구는 마라도나를 견제하기 위해서 만든 전술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라도나가 압박 축구에 고전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1988-89시즌 압박 축구가 탑재된 사키의 AC 밀란을 상대로 1골1도움을 기록하며 팀에 대승을 선물하고 다음시즌에도 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으면서 나폴리의 2번째 우승을 선사하는 등 자신을 막기 위해 고안한 사키이즘을 보란듯이 무너뜨리며 그가 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지 증명해보였다.
3. 사망
2020년 10월 말 마라도나의 경호원이 코로나19 증세를 보여 마라도나 또한 자가격리 중이었는데, 11월 3일(현지시간) 두부 외상 후에 출혈이 생겨 뇌 경막 아래 피가 고이는 경막하혈종으로 수술을 받고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올리보스의 병원에서 퇴원하였지만 2020년 11월 25일 심장마비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향년 60세. 아르헨티나 정부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지정했으며, SSC 나폴리 구단은 스타디오 산 파올로의 구장을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산 파올로'로 변경하기로 결정했으며 빠른 시일내로 변경을 완료하겠다는 결정을 했다. 또한 동일일자에 진행된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4차전 경기 전에는 마라도나를 기리기 위한 1분간의 추모 시간이 있었다.
마라도나의 죽음이 보도된 이후,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마라도나를 추모하고 있다. 한국 선수중에선 그를 우상으로 삼았던 이강인이 그를 추모했다. 네티즌들은 전설적인 축구선수로써 그를 추모하는 대다수의 여론과 약쟁이, 인종차별주의자를 뭣하러 애도하냐는 소수의 여론으로 엇갈리고 있다. 또 이와는 별개로 젊은 시절부터 상대 선수들로부터 경기에 뛸때마다 지나친 수준의 파울을 항상 당하다시피 했었고, 일찍이 마약에 중독되어 젊은 나이에 심장발작을 일으킨데다가 은퇴 이후에도 거의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수준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결국 올게 왔다는 반응도 있다.
4. 평가
펠레와 함께 축구사의 양대산맥으로 각종 축구 언론매체들이 선정하는 역대 선수 랭킹에서 TOP 3에 거의 고정적으로 포함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10대이던 1978년, 바르셀로나의 스카우트가 18살의 마라도나를 보기 위해 직접 아르헨티나로 찾아와 관찰을 하고 작성한 보고서가 있었는데 마치 축구의 신을 본 느낌이라는 그야말로 극찬의 일색으로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1979년 남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고 그해 발롱도르 수상자였던 케빈 키건을 누르고 구에린 스포르티보 당해 최고의 선수에 뽑혔을만큼 아직 유럽으로 넘어오지 않았던 10대 후반부터 신성불가침한 영역이었던 펠레, 디 스테파노를 소환할만큼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실력을 내뿜었다.
마라도나는 물론 일개 플레이어로서도 역대 최고의 반열에 놓이는 선수였지만, 동료들을 잘 이용하면서도 이들의 역량을 끌어올리는데 있어 뛰어난 리더라는 점도 언급할 수 있다. 일례로 마라도나는 고작 18살 소년일 때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부터 이미 주장을 맡을 정도로 강인한 리더십을 가진 선수였다. 국가대표로서도 당시 영원한 캡틴 파사레야가 있었던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주장이 아니었지만, 선수 1인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것으로 평가받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서 팀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우승을 이끌었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계속해서 주장으로서 역할을 맡았다.
그가 전성기 시절, 우승컵을 들었던 팀인 SSC 나폴리나 아르헨티나의 다른 멤버들을 감안해 볼 때, 축구에서 한 선수가 팀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가?의 한계치를 평가하는 사례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중하위권 수준인 나폴리를 단지 강팀으로만 끝나지 않고 세리에 A, UEFA컵 우승까지 이끌고 나간 것은 다름아닌 마라도나 단 한 명의 능력이었다. 또한 유독 마라도나의 월드컵 우승이 고평가되는 이유도, 당시 결코 강팀이라 불릴 수 없던 스쿼드를 이끌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말 그대로 혼자서 지배하며 진정한 하드캐리가 무엇인지를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활약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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