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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실형 2년 확정된 경남도지사 김경수 출생 과거 논란

by @#$*&! 2021.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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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형 2년 확정된 경남도지사 김경수 출생 과거 논란

 

1. 김경수의 프로필

 

출생 : 1967년 12월 1일,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용안리

본관 : 김해김씨

현재 소재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성동 창원교도소

 

대한민국의 정치인.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경상남도지사를 지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선되어 제37대 경상남도지사에 재임하였다. '친노의 막내'이자 '친문의 적장자'로 불리며 더불어민주당의 대권주자로서 많은 기대를 받던 정치인이었으나,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을 공모한 혐의로 2021년 7월 21일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도지사직을 상실하며 범죄자가 되어 역대 경상남도지사 중 유일하게 형사처벌로 인해 불명예 퇴진하였다. 아울러 형기 만료 이후 5년 동안 피선거권도 제한됨에 따라 정치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2. 김경수의 경력, 어린시절


1967년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용암리 출생이나 학창시절은 거의 진주에서 보냈다. 진주 천전초등학교, 진주남중학교, 진주동명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 진학, 졸업했다. 이후 신계륜 의원실 보좌관으로 들어갔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부터 연을 맺는다. 


제37대 경상남도지사로,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정계에 입문해 두 차례에 걸친 선거 패배를 딛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 경남 김해시 을 선거구에서 62.4%의 득표율로 당선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경상남도지사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어 52.8%의 득표율로 당선돼 경상남도지사가 되었다.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당선된 경상남도지사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가장 대표적인 친문계 정치인으로 손꼽히며 친문계로부터 새로운 차기 대권 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기 이전부터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하였고, 그의 대변인 격으로 활동해 왔다. 대통령 취임식 직전과 직후 김정숙 여사와 운전기사를 제외하고 문 대통령과 같은 차를 탄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과 매우 가까웠던데다 친노계 - 친문계의 정신적 고향인 PK 태생이기에 정치공학적으로 호남과 영남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되어 피의자로서 수사를 받았으며, 김경수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기각되었다.

이후 2018년 8월 24일, 허익범 특검이 김경수에 대해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의 공범으로 선거법위반 적용 및 불구속 기소를 결정했고 2019년 1월 30일,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항소 준비 중이다. 도지사직은 법정구속으로 인해 중지된 상태이다. 그리고 이후 4월 17일에 보석 허가 되어 석방됨으로서 도지사직에 복귀했다.

2020년 11월 6일, 김경수는 항소심에서도 징역 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2심 재판부 또한 1심과 마찬가지로 댓글조작 시연이 있었고 김경수가 이를 참관, 승인해 댓글조작에 공모한 게 맞다며 1심과 같이 유죄 판단하였다. 1심, 2심이 일관되게 김경수가 '킹크랩 시연회'를 참관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하여 이낙연·이재명 양강 구도에서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되던 김경수 지사가 사실상 낙마하면서 투톱 구도가 굳어졌다 평가된다.

친문계의 적자이자 차기대권주자로 큰 기대를 받았었지만 여론조작사건에 가담하고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유죄판결을 받으면서 정치생명이 벼랑끝으로 몰린 상황이다.

2021년 7월 21일에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었고 경남도지사직을 상실하였으며, 앞으로 22개월 동안 감옥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게다가 출소 후 5년간 피선거권도 제한되고 피선거권이 회복되더라도 환갑이 가까운 나이가 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회생하기는 어려워보인다. 


3. 김경수의 정치 활동


1994년 신계륜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2002년 노무현 대선 캠프에 합류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후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 연설기획비서관, 공보비서관을 두루 거쳤고 2006년에는 1년간 수행 비서를 맡았다. 퇴임 이후에도 봉하마을로 내려가 수행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사실을 문재인에게 알린 사람도 김경수 비서관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에는 중앙 정치와 거리를 두고 봉하재단 사무국장, 노무현 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을 지냈다.

2011년 민주통합당에 입당,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김해시 을 선거구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으나 현직 의원인 김태호에게 밀려 떨어지고,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도 경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홍준표 현직 지사에게 밀려 또 다시 낙선했다. 하지만 연이은 낙선에도 포기하지 않고 밑바닥 민심을 다지면서 20대 총선에서 다시 한 번 김해시 을에 도전해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 가장 많은 득표율을 거두며 승리했다. 이후 친문계 의원으로서 의정 활동에 전념하며 문재인 정부를 뒷받침하다가, 당 지도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단 한 번도 민주당 후보가 승리하지 못한 험지 중 험지인 경남도지사에 다시 도전,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 의혹을 정면돌파하면서 과반 이상의 표를 얻으며 경상남도에 최초로 민주당 깃발을 꽂는 데 성공했다.

 

4. 김경수의 학창 시절


1967년 12월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용안리에서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어머니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이자 장손으로 태어났다. 교육열 강했던 어머니는 아들을 괜찮은 중학교에 보내기를 위해 초등학교 6학년인 김경수만 인근 대도시인 진주시로 전학시켰다. 김경수는 친척 집에서 기거하면서 진주천전국민학교, 진주남중학교, 진주동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년 재수하여 86학번으로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 입학하였다.

80년대 후반은 반독재 학생운동이 가장 극렬했던 때로, 먼저 대학생이 된 동창들과 만나면 가끔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재수 생활 동안에는 공부하기 바빠 사회 현실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교정에 학생들이 던진 짱돌이 날고, 경찰이 쏜 최루탄이 난무하는 현실을 알게되면서 대한민국 정치에 강렬한 고민을 품게 되었다. 집안의 기대와 공무원인 아버지에 대한 걱정 등으로 많은 번민과 방황을 했지만 나만 출세하자고 조용히 공부만 하는 것은 시대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2학년에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대학교 3학년인 1989년 총학생회 학술부장 시절 가을 축제 때 ‘북한 바로알기 자료집’을 만들었다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 제작 반포 혐의로 구속되는 등 모두 세 차례 옥살이를 했다. 6월 항쟁이 끝난 뒤에는 그해 여름 방학에는 ‘공장활동’(공활)에 참가했다. 수원의 와우공단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를 택했는데 일이 익숙지 않은 그는 입사한 지 며칠 안 돼 쇠로 된 부품의 구멍을 다듬는 작업을 하다가 왼손 검지 손가락을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나중에 군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1996년 대학교 후배이자 동성동본인 부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사귀던 시절 결혼을 생각할 때 여자친구와는 동성동본인데다 본인은 영남, 여자친구는 호남(전남 신안) 출신이라 집안 어른들께 어떻게 허락을 받아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는데, 막상 부모님은 여자친구를 만나 본 뒤 흔쾌히 허락하셨다고 한다. 아내와 결혼할 때 조건이 정치 일은 해도 절대 출마는 안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 뒤에 남편이 민주당 국회의원에 경상남도지사까지 될 줄은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5. 김경수의 정치 입문


대학 졸업 후의 편집부 기자 생활을 했으나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94년 신계륜 의원실에서 일하던 학교 선배의 "국정감사 기간에만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여의도에 발을 디뎠다. 어떻게 보면 단기 아르바이트로 정치에 입문한 셈이다. 국정감사 후 신계륜 의원이 정책비서로 같이 일해보자는 권유를 했고, 이를 승낙하면서 본격적인 보좌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5대 총선에서 신 의원이 낙선하자 15대 국회에서는 유선호 의원실에서, 16대 국회에서는 임채정 의원실에서 근무했다. 2001년 말 청와대 정무수석에 임명된 유선호 전 의원의 요청에 따라 청와대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태어나기도 전에 휴전선에서 장교로 근무하다가 월북했던 외삼촌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3개월만에 청와대에서 보따리를 싸서 나가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 청와대에서 나온 것이 그를 새로운 만남으로 이끌었다. 이광재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전략기획팀 부국장으로 합류하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전략기획팀에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보여준 김경수 보좌관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거쳐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 행정관,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 대통령 공보비서관 등을 지냈다. 대선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안면조차 없는 사이였지만, 참여정부 집권 중반기에는 어느새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6.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


노무현 대통령 퇴임 이후 가족들과 함께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정착해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좌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저서인 운명은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그날 새벽, 자고 있었던 문재인 당시 변호사가 김경수 당시 비서관에게 노 전 대통령이 등산을 떠났다가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상태가 엄중하다는 연락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김 지사는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봉하를 떠나지 않고 봉하재단 사무국장,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을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의 비서이자 봉하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로 살면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간 노무현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은 큰 행복이었다고 김 의원은 회고했다. 오랫동안 보좌관 생활을 해왔지만 자신이 직접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결혼 전에 아내에게 약속까지 했지만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그는 '바보' 노무현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직접 정치에 뛰어들게 되었다.

 

7. 김경수 두 번의 낙선, 그리고 당선


2011년 야권 통합을 추진한 시민운동모임 ‘혁신과 통합’ 때부터 문재인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시작했다. 이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당시 주변에서 2011년 4·27 경남 김해시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가서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이 강했지만 고심 끝에 “꽃이 되기보다는 단결과 연대의 거름이 되고 싶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한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는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에게 패배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본인이 직접 경상남도 김해시 을 선거구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 새누리당 김태호 후보와 맞붙어 47.88%의 적지 않은 득표율을 얻었으나 아깝게 떨어졌다. 이후 18대 대선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의 대선 후보 수행팀을 전두지휘했다.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일했던 사이지만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문재인 대통령과 김경수 의원의 사이가 딱히 가깝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혁신과 통합'을 시작으로 18대 대선에 이르러서 문 대통령이 김 의원에게 대선 후보 수행팀장을 맡을 정도로 둘은 가까워졌다. 첫 대선 실패 이후 문 대통령은 어딜가나 김 의원과 함께 움직였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새누리당 홍준표 후보와 경쟁했지만 이번에는 꽤 큰 표[16]차이로 낙선했다. 하지만 당시까지 보수세가 강했던 경남이었고 보수계 중견 정치인인 김태호와 홍준표의 전국적인 지명도 등의 차이를 감안하면 선출직 정치인으로서는 신인에 가까운 김경수 입장에서는 선전한 편이었고, 김해시와 창원시 성산구에서는 오히려 홍준표를 앞섰다.

또 이 선거가 이후 김경수에게는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도지사 선거 전부터 "미소천사"라는 전국적 팬클럽이 조직되었는데, 선출직 경험이 없는 정치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노사모가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0년 16대 총선 낙선 시점에 이미 재선 국회의원이었다.

그후 절치부심 끝에 밑바닥부터 김해시 을 지역구에서 활동을 했고 민심을 얻어가는 데 성공했다. 2012년 선거 때는 사실상 본인도 김해시를 잘 알지 못했을 때 출마했다면 2016년 선거에서는 차원이 다른 상황에서 선거에 임했다고 할 수 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이만기 후보를 꺾고 무려 62.4%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민주당 후보들 중 전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김해시 갑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의 현역 의원 민홍철 후보가 재선에 성공하고, 함께 실시된 김해시장 재보궐선거 및 시의원 보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허성곤이 당선되면서 더불어민주당이 김해시에서 완승하기도 했다.

당선되고 난 뒤 민홍철 김해 갑 국회의원 당선자, 허성곤 김해시장 재선거 당선자, 김종근 김해시의원 보궐선거 당선자, 동시에 낙동강 벨트에서 살아남은 양산시 을의 서형수 당선자와 함께 봉하마을로 가서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봉하마을은 20대 국회부터 김해 갑에 속해있지만 원래 김해 을 지역구였고, 김경수 의원의 뿌리 깊은 연고 때문에 아직도 다양한 행사 때 김경수 의원이 주최측의 역할을 맡는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에는 인수위원회를 대신할 국정자문위원회에서 기획분과를 맡았다.

 

8. 김경수 경상남도지사 재출마 당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부터 더불어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경상남도지사 후보로 거론되어 왔다.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출 때문에 원내 제1당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김경수를 제외한 현역 의원들 중 몇몇 의원들에겐 불출마를 권고했다는 썰이 있다. 다른 곳은 몰라도 3당 합당 이후 보수의 텃밭으로 변해버린 경남에서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선택을 받았다는 건 정치적으로 엄청난 의미가 있는 일이기에, 필승 카드로 보았던 김경수의 출마를 위하여 구태여 현역 의원을 내보내지 않아도 될 만한 곳에서는 출혈을 내지 않으려 했던 것.

더불어민주당 지지세가 약한 서부 경남에 위치한 고성군에서 태어났고, 또 서부 경남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진주시에서 고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서부 경남을 공략하기에는 이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김경수 본인 스스로 출마 의사가 전혀 없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고 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지 이제 겨우 2년 조금 넘은 초선 의원이라 지지층 사이에서도 "김경수가 유력한 승리 카드라는 점은 인정하나, 본인이 자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내보내려 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컸다.

2018년 4월 2일, 결국 더불어민주당의 경남도지사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2012년 총선 때 김해시 을에서 맞붙었던 김태호 전 지사가 출마하는 것이 사실상 확정되면서 6년 만에 리턴 매치가 성사되었다.  4월 19일 공식 출마 선언을 했는데, 원래는 오전에 경남 진주에서 출마 선언을 하기로 예정되었지만 드루킹 의혹으로 오후로 미룬 뒤 4시 30분 국회 정론관에서 출마 선언을 하였다. 한편, 출마 선언을 미룬 걸 두고 몇몇 기자들은 불출마하기로 했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5월 3일 부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고 14일 본인도 참석한 본회의에서 처리되었다. 5월 17일 캠프 개소식을 열고 본격적인 선거 운동은 5월 31일부터 시작했다.

출구조사에서는 김경수 후보가 16% 차이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음에도 개표 초중반에는 김태호 후보가 5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앞서면서 이변이 연출되나 싶었지만, 밤 11시를 기점으로 따라잡기 시작하면서 개표율을 20% 넘긴 시점에서 결국 역전에 성공했다. 개표 초반 김태호 후보가 앞섰던 것은 경남에서도 특히나 보수세가 강한 서부 지역을 먼저 개표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마침 김경수 지지율이 높은 창원시에서 개표기가 고장나는 등의 문제로 수작업으로 개표하느라 늦어진 점도 작용했다.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당선된 최초의 경남도지사이며 친문 핵심 인사로서 당원들의 지지도도 압도적이기 때문에 드루킹 사건이나 경남도정에서 이렇다 할 하자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명실상부한 20대 대선의 잠룡이자 문재인 대통령의 후계자로 부상했다고 할 수 있다. 김경수 본인은 JTBC와의 인터뷰에서 더 큰 정치에 도전할 뜻이 있냐는 질문에 "더 큰 정치 부분은 제가 져야 할 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경남도민들께서 저한테 주신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무소속의 깃발을 들고 경남도지사에 도전해 성공한 후보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주목을 받은 바가 있었지만, 김경수는 아예 민주당 깃발을 들고 나가서 한국당이 경남에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를 상대로 예전의 패배를 설욕하면서 승리하였다.

당선 다음날인 15일, 여의도에서 열리는 민주당 광역단체장 당선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거제, 통영, 고성, 사천, 남해, 하동, 진주, 의령, 함안 9개 시군을 돌며 민생 현안을 점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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